아수라 – 한 소년의 육도윤회 천기누설 겸 감상

헤이안 혹은 가마쿠라 시대로 추측되는 전란과 기근에 휩싸인 대지를 짐승같은 소년이 방랑합니다. 소년이라 칭하기도 힘들만큼 왜소하고 어린 꼬마는 야성에만 의존해 살아가다가 여러 군상들을 만나며 인간성을 돌이켜 갑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인간으로 거듭난 순간부터 진정한 업보를 떠안기 시작하죠.

 

천기누설이 있으니 주의하세요.


본작에 주목했던 이유는 작품 자체보단 좋아하는 TV애니인 ‘TIGER & BUNNY’의 감독이 연출한 극장판이란 점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에 연재됐던 원작에 대해 조사하거나 본작을 접하면서 이런 작품이었나 싶어 감상을 정리해보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 보고 나니 불교 애니인가 싶기도 한데, 솔직히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을 애니로 만든 붓다보다 불법에 대해 훨씬 충실하면서도 극적으로 설파하는 작품같더군요. 물론 특정종교를 넘어선 주제와 논법을 구사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요.

 

가장 눈에 들어온 소품은 바로 다리였습니다. 아수라는 다리 밑에서 비를 피하다가 스님을 처음 만났고, 후반에는 줄다리 위에서 떨어졌죠. 그리고 정인이라 할 와카사와 마지막으로 만난 곳 역시 다리 위였고요. 폭우 때문에 물이 불어난 냇가의 다리에서 만난 스님은 한 짐승에게 생명의 가치와 인간성에 대해 가르쳐줬으며, 아수라는 자신에게 살심을 품은 자들이 놓은 불 때문에 타오른 줄다리 위에서 스님의 가르침과는 또 다른 인간성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마지막 다리 위에서 아수라는 속세의 마지막 인연을 떠나보내며 스스로의 육도윤회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또한 제작진이 비와 눈을 비롯한 물과 불길을 대비시키듯 혹은 순환시키듯 구성하는 대목도 많더군요. 물이 아수라의 몸과 마음을 인간답게 살찌우는 요소라면 불은 환생으로 이어질 정화를 뜻하는 듯합니다. 작중의 마을 사람들도 비가 오니 축복이라 말하며 아수라가 뜯어먹은 듯한 시체가 흘러내려가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고요.

한 어미는 제 자식을 불속에 떨구는 바람에 그를 축생도 혹은 수라도에 떨어뜨리고 맙니다. 불에 타죽을 뻔 했던 아기는 때마침 내린 비로 인해 불이 꺼지며 모친이 정신을 차린 덕분에 살아남지요. 소년은 훗날 불바다가 된 산속의 불탄 다리 위에서 계곡 밑의 강물을 향해 떨어지며 나름의 깨달음을 얻고 인간도 혹은 천상도로 나아갈 기회를 얻습니다. 두 시퀀스 다 인간의 추악한 살심이 극에 달하면서 하늘이 붉게 물든 게 눈에 밟히더라고요.


훗날 아수라는 와카사의 품에 안긴 채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갓난아기 시절을 꿈꾸다가 트라우마라 할 불기운을 느끼고 깨어나기도 하지만, 이는 어머니처럼 자신을 구워먹으려던 불이 아니라 자신을 살리고자 상처를 급히 지지던 숯불이었습니다. 기이하게도 당시 와카사는 아수라를 물속에서 건져낸 직후였단 말이죠.


작중에서 아수라가 인간도로 조금씩 나아가는, 즉 인간성을 돌이킨 사건들은 비가 오는 날 벌어지곤 합니다. 와카사에 대한 마음과 투기로 인한 살심을 깨달았을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그가 부정적인 인간성마저 돌이키고 절규한 순간에도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 일어난 홍수 그리고 이어진 가뭄으로 인해 그를 둘러싼 세상은 도로 말라붙으며 세인들은 아수라처럼 악귀나찰같은 족속들로 변해가죠. 마치 아수라 자신의 오욕칠정이 이런 천재지변을 일으킨 듯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또한 막판에 이르러 더 이상 비가 오지 않고 만물이 얼어붙은 계절 속에서 눈이 내리는 장면은 세상사에 부대낀 나머지 지친 영혼들의 싸늘하게 가라앉은 내면과 이제는 그저 무심한 듯 처연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바람을 대변합니다.

 

 

자연 그리고 인성

 

이 작품의 특징은 인간의 오만과 이기심. 그리고 애정과 자비심같은 감정들이 자연현상으로 인한 생활상과 사실적으로 교차한다는 점입니다. 제 자식을 열심히 보살피다가도 주리다 못해 정신이 나가 잡아먹으려 들었던 여인의 행각만 그렇듯 조명한 게 아니에요. 가뭄이 멎고 비가 내리면서 형편이 트이자, 와카사를 비롯한 주민들은 나름 선심도 쓰고 서로 보살피기도 하면서 살아가죠. 와카사가 죽어가던 아수라를 거둬 숨겨주고선 양식을 나눠주는 행동 역시 이런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그녀가 제공한 은신처가 곡식을 빻는 물레방앗간이란 미장센도 이와 적절하게 맞물리죠.


그러나 홍수와 가뭄이 연달아 터지며 기근이 횡행하기 시작하자, 와카사를 비롯한 주변인물들의 언행도 조금씩 메말라가기 시작하며 서로를 타박하고 후벼 파기까지 합니다. 곡기로 인한 외양과 행동의 변화가 이토록 처절하면서도 비참하게 묘사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죠.


아수라의 식인 행각을 비롯해 인육에 대한 테제가 종종 언급되는데, 일본인들은 에도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고기요리를 약으로나 먹었던지라 네발 달린 짐승들의 고기를 먹는 걸 꺼리는 풍조가 있었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풍요롭던 시절의 자연은 아름답게 묘사되지만, 마을의 빈곤이 심화되면서 주민들의 심지가 황폐해지고 이에 맞추듯 짐승들을 비롯한 자연의 잔혹한 실상도 새삼 부각시키더군요. 늑대가 다람쥐를 잡아먹을 때 슬쩍 와카사의 집을 비추는 시퀀스나 굶주린 와카사가 예전의 아수라처럼 도마뱀을 잡아먹고자 헛손질을 반복하는 장면들이 괜히 나온 게 아니죠.


안 그래도 지랄 맞은 세상을 한층 가열시키는 결정타는 늘 그랬듯 같은 인간들이 가합니다. 하루끼니와 생존마저 여의치 않은 하층민들 위에 군림하는 상류층들은 홍수가 나든 가뭄에 세상이 말라붙든 떵떵거리면서 아랫것들을 쥐어짜기만 바쁘더군요. 기가 막히게도 백성들의 기근에는 일절 신경도 안 썼던 윗대가리께선 제 아들의 원수가 살아남아서 애마를 죽이자 발끈해서는 쌀 일년치를 현상금으로 내걸더군요. 그깟 말이 뭐길래. 게다가 결국 언제든 백성들에게 베풀 양곡은 충분했다는 뜻 아닙니까. 이런 개떡같은 진상을 봤나. 더욱이 이놈의 사회체계에 길들어져설랑 뒤엎을 꿈도 못 꾸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기근을 결정적으로 굳힌 거나 다름없는 윗놈들이 아니라 아수라야말로 자신들이 겪는 고난의 근원이라는 듯 박해하고 때려잡으려 들더라고요. 장난하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쉽게도 현대사회에서도 비일비재한 양상인지라 씁쓸한 상념만 밀려들었습니다.

 

 

육도윤회

 

본작에선 아수라가 추락하는 국면이 반복되곤 합니다. 이 소년은 떨어질 때마다 비참한 인간사를 대표하는 터전과 맞닥뜨리고 그 때마다 새롭게 거듭납니다. 결정적인 변모는 불속으로 떨어지는 단락들에서 성취되는데, 열반한 승려들이 다비식을 치르듯 아수라는 비참한 트라우마라 할 초열지옥을 거치며 인간으로 거듭나죠.


스님이 소년에게 아수라란 법명을 하사한 이유는 뭘까요? 아수라는 원래 힌두신화에서 그놈의 성질 때문에서 천덕꾸러기로 낙인찍힌 신족인데, 나름 애정이 세서 자기 딸 욕보인 인드라한테 전쟁 걸었더니 인드라는 전쟁하다 고작 버러지 좀 살려줬다며 용서받았고 아수라는 전쟁 일으켰다며 천벌을 받았다 하니 말 다했죠. 불교에선 아수라들의 왕이 불문에 귀의했다고 하며, 깨달음을 얻고서 태양을 상징하는 대일여래 즉 비로자나불로 거듭났다고 합니다. 아수라의 일생을 고스란히 반추시키는 신이라 할 수 있겠죠. 덧붙이자면 무엇보다도 아수라 자신이 수라도를 비롯한 육도환생의 와중에 놓인 존재라는 진실을 스님이 간파한 탓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어요.


잘 나가는 어느 닌자 만화에도 육도의 개념이 나왔더랬죠. 불법에 따르면 인간은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수라도, 인간도, 천상도를 윤회하며 환생한다고 합니다. 즉 짐승과도 같던 소년이 아수라나 다름없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진실로 인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담긴 작명이었던 셈이죠. 축생도에 떨어진 거나 다름없던 아수라는 가까스로 구원을 성취할, 인간성을 돌이킬 여지가 남아있었던 것이며 스님은 이를 직관적으로 통찰해냈거든요.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를 거닐 때 아수라는 고통스럽지도, 번민에 휩싸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라도에서 인간도로 올라서며 인간성을 돌이켰기에 이전에 몰랐던 인간만의 고통과 악심에 대해 깨우치고선 자신의 가슴을 치고 말죠. 수라도에 떨어진 이들은 타인을 시샘하고 타박하는 자들이라 하던가요. 아수라는 인간성을 돌이킨 후에도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스님 앞에서 자신과 다른 인간들의 본성을 헐뜯고 시기합니다. 그러자 스님은 아수라가 마귀 아닌 그저 인간이란 사실을 다시금 깨우쳐주고자 자신의 팔마저 내주며, 아수라는 이전과 달리 스님의 팔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달아나고 맙니다. 이를 보던 스님은 눈물을 떨굽니다. 아수라가 인간으로써 거듭났다는 걸 확인한데 대한 기쁨과 인간이기에 고통에 떨 수밖에 없는 소년에 대한 연민이 뒤섞인 눈물을요.


불교의 육도환생은 인간성의 변질이나 회복에 대한 은유란 관점이 있죠. 축생도에 떨어졌던 아수라가 스님이 된 결말은 그의 긴 시련이 천상도에 이를만한 심기를 닦아가는 과정이었다는 걸 가르쳐줍니다.

 

 

닫으며

 

또 다시 버림받은 아수라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어!’ 원작을 본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대사이자 작품의 표어였다고 하더군요.


아수라는 어머니와 와카사를 통해 거듭나곤 합니다. 이들은 아수라에게 가르쳐준 것도, 삶의 방식도 정반대였으나 위치 자체는 동일한 여인들이었죠. 짐승이나 다름없던 아수라는 와카사와 어울리며 조금씩 인간다운 기쁨도 깨닫지만, 짐승처럼 지내던 시절보다 더욱 쓰라린 고통과 비탄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소년에게 여인은 어머니이자 친구이고, 누이이며 첫사랑이자 세상 그 자체였죠. 이치와 설법에 따라 인간성을 논하던 스님과 달리 마음으로 인간성을 깨우쳐주던 와카사가 청년에게만 눈길을 주자 아수라는 어머니를, 세상 자체를 박탈당한 듯한 상실감 때문에 청년을 해치려들었다가 내쫓기고 맙니다.

와카사한테 박대당한 직후, 어느 원숭이 어미와 새끼를 죽이려 하는 게 안쓰러웠습니다. 자신은 친모에게, 그리고 두 번째 어머니나 다름없던 여인에게 버림받았거늘 한갓 짐승이 제 새끼를 함함하는 꼴을 보니 미칠 노릇이었던 게죠. 이따위 세상에 널 낳아준 애미를 저주하란 절규는 스스로의 심경 그 자체였을 겁니다.


아수라는 인간이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는 듯이 자신에게 난 송곳니가 여타 인간들과 다른 아귀 즉 짐승이란 표식이라며 한탄합니다. 이 절규는 와카사에게 버림받으면서 진실한 슬픔을 깨달은 동시에 그녀의 애정으로 인해 인성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죠. 소년은 와카사의 연인인 시치로를 죽이려들었을 때부터 잡아먹기 위해 죽이려 들질 않고 스스로의 심마를 풀고자 거듭 살생을 시도했습니다. 서글프지만 이 또한 아수라가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반증이었으며, 그가 관리의 말을 잡은 것도 자신이 아니라 와카사의 생명을 구해주기 위함이었고 처음으로 자신의 포획물을 타인에게 나눠주는 적선마저 시도하거든요.


와카사가 한 번 내친 아수라를 끝까지 안 믿고 비난하는 걸 보면 답답하더라고요.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를 비롯한 말종들과 달리 끝까지 인육이라 생각한 고기를 안 먹으며 마지막 선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더욱이 울분을 못 참은 아수라가 자신을 때려잡으려는 이들이 득실대는 집밖으로 나가려 하자 말리려 하지 않았던가요. 그녀의 모든 행동은 결국 자기만족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선행도 악행도 결국 이런 자기만족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수라처럼, 이름 모를 스님처럼 그녀 역시 인간이었을 따름인 겝니다.


그 반면 마을 사람들은 갈수록 짐승같이 변모해갑니다. 막판에 이르러 1년치 양식 때문에,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우고자 광신도들마냥 단체로 아수라를 사냥하는 행태가 가관이죠. 아수라는 불바다에 둘러쌓인 상황에서 야차처럼 변해 이전의 자신처럼 흉흉한 눈빛을 내비치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치를 떱니다. 인간이 된 아수라가 짐승이 된 인간들을 접한 순간이랄까요. 아마 이 순간 자기 자신을 비롯한 인간들에 대해 큰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닐지.


지친 아수라가 와카사의 상여를 무심히 지나치는 장면이 서글프더군요. 아수라와 와카사가 마지막으로 만난 순간, 시간이 멈춘 듯 눈의 결정이 허공에 뜬 채 그녀의 주변을 수놓는가 싶더니 초연히 지나친 직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소년이 소녀에게 품었던 마음과 상실감 말고도 변모와 성장을 단적으로 요약해서 보여줍니다. 이 와중에도 와카사의 얼굴은 희고 희며 그녀의 주변에 흩날리는 눈의 결정들이 소녀의 주검에 일종의 아이콘과도 같은 숭고함을 부여합니다. 아수라에게 불법을 설파하던 스님과는 또 다른 신성이라 할 수 있죠. 아수라의 얼굴 또한 이전보다 훨씬 인간답게 변모했으며, 자신이 짐승이란 증거라 외쳤던 송곳니도 더 이상 보이지 않죠.


아수라는 출가한 후, 불상과 보살상을 깎으며 불도를 닦습니다. 이전에 비해 외모도 눈빛도 초탈하게 변한 걸 보니 애달프더라고요. 그가 태어날 적부터 불상이 함께 했다는 걸 생각하면 부처님이나 보살은 그에게 있어 어머니를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겠죠. 자신의 어머니와 와카사같은. 아수라가 다른 데도 아니고 와카사가 그리도 가고 싶어 한 도읍에서 염불을 외며 산다는 것도 알싸했죠.


더욱이 작품 서두에 인간이 일으킨 전란으로 인해 불타는 사찰과 불상이 나왔는데, 스텝롤이 다 지나간 후 나온 도읍 즉 아수라가 거주하는 곳이 전란에서 회복된 서두의 도시 같았기에 육도윤회에 대한 본작의 논제에 방점을 찍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이놈의 세상은 숱한 업보를 거듭 흩뿌리지만 영원한 번영도 끝없는 기근도 존재하지 않으며, 표표히 윤회할 따름이라고 갈파하듯이 말이죠.

 

 

그밖에

 

본작을 보면서 이제는 원로가 다 돼가는 고참 성우분들이 참 많이도 나온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드래곤볼의 손씨일가 사내놈들을 도맡다시피 하는 노자와 마사코 여사가 아수라를 연기하셨는데, 일본의 국민성우 중 한 분으로 공인받는 분이시죠. 특유의 야생아 목소리와 연륜을 절묘하게 살려내 세파에 지치고 고통스러워하는 아수라의 인성을 훌륭하게 표현하신 듯합니다. 게다가 야마구치 캇페이 선생이 까불다 죽는 양아치 도련님으로 잠깐 나와서 깜짝 놀랐죠. 감독의 전작인 ‘TIGER & BUNNY’의 주인공 코테츠를 연기하셨던 히라타 히로아키 선생도 와카사의 연인을 연기하셨습니다. 코테츠의 친구 록 바이슨을 연기한 쿠스노텐 선생도 슬쩍 출연하고요. 그러고 보니 ‘TIGER & BUNNY’에서도 그랬지만 3D연출이 장난 아니더라고요. 흙먼지같이 세세한 입자의 표현들이 아주 그냥.

 

작중의 스님이 직접 언급했듯 인간은, 생물은 또 다른 생명을 어떤 식으로든 해치며 살아가고자 버둥댑니다. 본작에서 거듭나오는 식인행위도 그 연장선일 따름이었고요. 무정한 세상이 강요하는 이 섭리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그저 인간에게 부과된 업일 따름입니다.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으로 유명한 짐바르도 선생도 개인이 엇나가게끔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겁박하는 세상에 맞서야할 가치에 대해 역설했던 게 생각나는군요. 인간은 이 업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아니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인간이었기에 구원받았지만, 인간이었기에 좌절을 금치 못한 소년의 윤회를 통해 삶과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되씹어보시고 싶은 분들에게 이 작품을 권하며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P.S. 10대시절의 히로인, 클램프식 오그리 토그리 커플의 한 축, 딸내미 바보 파괴신이 중에 어느 아수라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이히히.



덧글

  • 암흑요정 2013/10/10 12:40 # 답글

    원작이 되는 만화는 그 참혹한 표현 때문에 연재중단을 강요받았고, 연재가 계속되었다면 아수라는 미코토(命)로 개명될 예정이었다는군요.
  • zemonan 2013/10/10 23:37 #

    작가분의 작품들을 한 번 찾아보니 발표 때마다 숱한 논란을 일으키는 게 정기코스같습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참 적나라하면서도 애잔하게 묘사하시는 듯한데, 아마 이 양반 작품 중에서 애니화된 물건은 본작밖에 없을 듯하네요. 여타 작품들도 참 무지막지한지라요.
  • 신화만세 2013/10/10 13:53 # 삭제 답글

    처음 들어보는 작품인데 이 작품은 한 소년이 야수에서 인간으로 변하면서 겪는 과정과 인간의 근본적인 본질에 관해 고찰하는 만화인것 같군요. 어찌보면 인간은 이익을 이성보다 우선시해서 저런 광기를 부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님의 리뷰 덕택에 또 하나의 가르침을 받고 갑니다.
    p.s 클램프가 부녀자들인 덕분인지 그들의 작품을 보면 동성애가 잘 나오더군요. 특히 어렸을때 재미있게 봤던 카드캡터 사쿠라도 다시 보니 인간 관계도가 막장이더군요. 허허
  • zemonan 2013/10/10 23:40 #

    욕망 혹은 욕구를 비롯한 야성 또한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본능이지만, 본작의 인물들은 세파를 못 견디고 야성 자체에 취해 인간이길 포기한 경우가 많았죠. 살아남아야한다는 최강의 핑계와 권위라는 명목의 정합성이 합쳐지니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돌진하기도 하고요.
    클램프 작품들 중엔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그게 그런 거였나?'라고 깨닫는 대목이 아주 껄끄러운 쪽으로 많아서 종종 쇼크먹곤 했었답니다. 으흐.
  • 일렉트리아 2013/10/10 15:59 # 답글

    재미있더군요.확실히 충격적이였습니다.
  • zemonan 2013/10/10 23:41 #

    선이 굵은 작품이라서 부담스럽지만, 주제나 성우분들의 연기가 참 마음에 들더라고요.
  • G-32호 2013/10/10 20:30 # 답글

    참 저거보면서 속이 많이 쓰렸죠

    그런데 저거 보기전 예고영상을 보고는 식인귀 주인공이 소녀에게 구원받고 그 소녀가 굶어서 죽게되자 그 원인이 된 폭정을 휘두르는 영주에게 혈혈단신으로 달겨들어 모든게 불탄다는 내용인줄 알았지 말입니다.
  • zemonan 2013/10/10 23:42 #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정작 접하고 보니 훨씬 끔찍한 내용과 결말을 담고 있어서 경악했습니다. 육체적 혹은 물리적인 잔인성보다 정신적인 압박이 더 생생하기도 했고요.
  • 신화만세 2013/10/12 00:07 # 삭제 답글

    아수라 성우를 맡은 노자와 마사코님은 일본의 박영남으로 불릴 정도로 소년 연기에 특화되있더군요. 종종 여자를 맡을때는 할머니 역할을 맡긴 하지만요. 예전에 손오공의 일본판 목소리를 듣고 충공깽에 빠졌었죠. 아무리 들어도 저한텐 한국판의 그 멋진 목소리가 마음에 들더군요. 쩝....
  • zemonan 2013/10/12 17:40 #

    저도 일본판보단 한국판이 더 마음에 들더라고요. 다만 노자와 여사는 손오공의 어린 시절부터 죽 연기하셨기에 일본시청자들은 다르게 받아들였을 테고, 이 분만이 손오공을 연기해야만 한다는 믿음이 자리잡을 만도 하겠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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