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성의 가르간티아는 요새는 참 보기 드문 정통파 SF활극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고전 SF의 집합체라 봐야겠죠. 1화 전반부에 소개된 밑도 끝도 없는 인간과 외계종족의 전쟁 및 통제사회는 ‘스타쉽 트루퍼스(정확히 말하면 원작인 소설에 더 가깝겠지만요.)’ 혹은 ‘영원한 전쟁’을 연상시키며, 1화 후반부터 주요무대로 등장하는 바다뿐인 세상과 해적들은 ‘워터월드’와 유사합니다. …하나같이 거창하게 제작에 착수했다가 대차게 말아먹은 영상물들이란 공통점을 지니고 있군요. 본작이 안 그렇게 되길 빌어야겠죠.
그런데 저는 이 작품을 보고 나니 오히려 ‘늑대와 춤을’이나 ‘아바타’ 그리고 이 작품들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에 영감을 제공한 ‘화성의 존 카터’ 씨리즈가 떠올랐습니다. 괴리가 적잖은 두 문명이 뜻밖의 사태로 인해 교차하며, 한쪽 세상에 속해있던 군인이 딴 세상에서 좌충우돌하며 새로이 자리를 잡아가는 얼개 때문일 겁니다.
큼직한 배경인 가르간티아와 인류동맹, 주인공인 에이미와 레드의 대조성은 각자에 대해 소개되는 1화 전반부와 중반부의 분위기 연출이 반대된다는 점에서도 드러나죠. 레드는 잠에서 깨며 전투로 돌입하며, 정신없이 날아다닙니다. 즉 정적인 상태에서 동적인 상태로 들어서죠. 그리고 에이미는 기운차게 뛰어다니다가 해체실에 머물고 배의 분위기 역시 조금씩 가라앉아가고요.
1화 서두에서 아발론을 소개한 직후, 폐허가 된 거주선과 히디어스의 존재를 시사하는데요, 이는 해당 시퀀스가 애국애족과 적대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전쟁선동영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인류동맹은 황금비율도를 국기로 삼고 있으며, 자신들이야말로 인류를 대표하는 단체고 인간된 자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마땅히 따라야한다는 국가개념을 참 일찍부터 여러모로 드러내죠. 2화에서 챔버가 대뜸 인류동맹에 가입하라 말하는 것만 해도 참. 물론 이런 이념은 단순히 선민사상이나 만물의 영장 운운에서 비롯됐다기보단 뜻밖의 재난으로 인해 우주에서 힘겹게 살아가야만 했던 자들이 구심점으로써 내세운 사상에 가까울 겁니다. 본작에 나온 히디우스와 인류동맹의 대립 그리고 인간이 이룩한 관리사회는 ‘스타쉽 트루퍼즈’와 ‘노인의 전쟁’같은 작품들에서 본뜬 구석이 많아요. 동맹은 의사소통이 안 되는 외계버러지(라고 추측되는 종족)들과 종족의 생존을 걸고 총력전을 펼치며, 수면부터 휴식 및 성행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동을 인공지능과 사회체계가 관리합니다. 또한 군인들이 나름 강인한 심신을 지녔으며 고성능 파워드 슈트를 조종하는데도 불구하고 적이 워낙 무지막지하기에 별반 돋보이지 않는다는 점, 군역을 수행해야만 기본적인 권리가 인정된다는 점 등등…. 가혹한 우주환경과 적들에게 대응하면서 이런 시스템이 정착된 거라 볼 수 있는데, 인류를 비롯해 다양한 생명을 낳은 지구와 달리 우주는 생명의 존재마저 쉽게 용납하질 않는 공간이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취침마저 수면계발시간이라니. ‘인셉션’에서 꿈을 조종하는 기계가 널리 퍼진 계기는 원래 군인들의 이미지 트레이닝을 폭넓게 창출하려던 데서 비롯됐다죠. 세상살이에서 마지막 휴식시간이라 할 잠마저 이따위로 각박하게 이용해먹어야겠냐…. 남이 밥 먹을 때랑 잘 때 건드리는 것만큼 치사하고 더러븐 짓거리도 없거늘 말입니다.
그리고 1화 후반부터 주요 배경으로 나오는 가르간티아의 경우 동맹의 우주선 및 기기들과 명백히 대조됩니다. 모든 기기가 깔끔하기에 통제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우주의 군대와 녹슬고 난잡한 배의 내부 및 구조가 이질감을 부각시키는데, 자잘한 차이점들이 슬쩍 눈에 밟히더라고요. 예를 들어 동맹은 참 살벌할 만큼 효율성을 중시하는지 문자도 컴퓨터 2진법 체계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고, 에이미가 내뱉은 상욕들이 챔버의 번역을 통해 할리우드 영화에서 숱하게 나오는 말들이란 사실이 드러나죠. 언어문화체계만 놓고 보면 영어권의 후예들일지도 모르겠군요.
레드가 말하는 동맹의 기록에 따르면 지구는 태양의 이상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빙하기에 접어들었고, 에이미는 이때 쌓인 얼음들이 녹으며 지구가 바다로 뒤덮였다고 하는데…. ‘아리아’의 화성이랍니까? 그러고 보니 존 카터 씨리즈도 화성이 배경이었죠. 음. 가르간티아 선단이 은하길로 접어들면서 컴컴했던 주택들의 조명이 켜지기 시작하는 연출이 깨알 같고, 하늘로 뻗는 벼락과 히디우스의 빛줄기가 어째 비슷해 보이던데 무슨 야료있는 거 아닐까요? 빛벌레라, 나노머신인가….
선단에선 통신기기보다 조명신호와 수신호를 더 많이 쓰고 있는데, 통신장비가 후져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배와 바다의 소음이 크기도 하고 전기를 아껴 써야 해서 저러는 걸 테죠. 실제로 선단의 지휘부 혹은 보좌관인 리짓과 대표에게 연결하는 회선은 팍팍 쓰고 있잖습니까? 뭐 컴퓨터같은 디지털 기술이 전무한 걸 보면 문명이 어지간히도 후퇴한 건 확실해 보입니다만.
좌우간 언어체계와 기술만이 아니라 여러 모로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레드를 비롯한 동맹의 병사들 혹은 국민들은 사열식을 보니 대체로 피부와 모발의 색소가 옅은 편이더군요. 우주를 오래도록 항해하며 닫힌 공간에서 오래 생활한 탓인지, 아니면 전반적인 유전자 조작에서 비롯된 결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뭐, 동맹의 통제방식을 보건대 사회구성원들에게 정신적 유전적 조작을 가했다고 한들 놀랄 것도 없겠죠. 에이미의 말마따나 레드는 그 자신이 병기의 일부로써 조정된 인간답게 불필요한 근육도 최대한 배제한 육체를 지니고 있던데, 레드의 장비와 차림새, 외모는 뜨거운 바다에서 살아온 인간들이 보기엔 말 그대로 외계인이라 간주할 만 했죠. 반면 가르간티아의 주민들은 생동감이 넘칩니다. 차림새와 장비도 통일되지 않으며, 햇볕에 그을린 피부를 지닌 이들이 많죠. 주연인 에이미와 조연인 베로스를 비롯해 주요인물과 엑스트라 할 것 없이 말입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만요.
하지만 동맹의 거주공간인 아발론과 가르간티아는 큰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둘 다 엄혹한 자연 혹은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며 생존을 모색하는 표류선들이라는 겁니다. 두 사회의 구성원들은 가차 없는 환경에서 살아남고자 스스로와 주변사람들마저 옥죄는 삶에 길들여진 자들이며, 소속된 집단의 생존을 위해 나름대로 치열하게 싸워가는 투사들이죠. 가르간티아는 제한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주택들을 복잡하게 얽어놨으며, 전력이 희귀하기에 등화관제를 철저히 실시하고 특정 구역이 위험하다 싶으면 통째로 떼내는 걸 상례로 여기고 있거든요. 다만 아발론의 구성원들이 지나치게 자신들을 통제하는 데 반해 가르간티아의 주민들은 스스로의 역동적인 활력과 자연의 제한이 맞부딪히면서 자아낸 생활양상을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구가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요.
그리고 두 문명의 가장 큰 차이 또한 2화 말미에 드러나는데요, 챔버가 우주에서 이데온 마냥 온몸으로 난사하던 레이져들이 지구에선 황당한 위력을 발휘하는 걸 보고 우주구와 지역구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죠. 전투가 아니라 섬멸이라 표현하는 레드 일행의 언사는 동맹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행보를 취해왔는지 잘 보여줍니다. 협상과 공존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되는 적들과 박 터지게 싸운 족속들답게 전투행위라곤 섬멸전밖에 취할 줄 모르는 겁니다. 막되 보이는 해적들도 쓸 만한 자원과 인재를 얻으면 그만인지라 나름 타협할 여지가 있거늘. 가르간티아의 발굴행위든 해적들의 드잡이질이든 다 먹고 살려 하는 짓거리잖아요. 하지만 동맹에게 있어 히디우스는 ‘스타쉽 트루퍼즈’의 벌레들마냥 박멸대상에 불과하며, 이런 기준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레드는 또 다른 인간들을 죽일 때조차 살상행위를 한다는 느낌보단 그냥 찍어낸다고만 인식하면서 담담하게 제 할 일을 완수하죠. 이런 괴리 역시 앞서도 말씀드렸듯 가혹한 우주와 한 번 망하긴 했어도 부잣집 3년이란 법칙대로 아직 인간이 숨 좀 돌리며 살 여지가 있는 물빛 행성 즉 생존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됐을 겁니다.
First Blood
전쟁질밖에 모르던 군인이 딴 세상의 주민들과 마찰을 빚으며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은 커트 러셀 주연의 ‘솔저’와도 흡사한데, 등장인물들에 대해서도 간단히 짚어보죠.
배달부라 할 에이미는 건강하고도 기운찬 소녀인데, 호기심이 얼마나 왕성한지 신새벽에 챔버를 구경하러 옵니다. 그녀의 동생인 베벨은 누나와 달리 병약하지만, 옷의 무늬와 해맑은 벽안 그리고 호기심 많고 편견 없는 시야를 지녔다는 점은 쏙 뺐죠. 남매가 둘 다 직관력이 범상찮더군요. 에이미는 레드 개인에 대해서, 베벨은 좀 더 거시적인 진실을 통찰해내고 있으니까요. 우주선과 대기권 탈출 속도에 대한 개념도 언급하는 걸 보면, 얘 선생이 꽤나 박식한가 봐요.
에이미가 데리고 다니는 날다람쥐와 통 죽이 안 맞는 정비사 피니온을 보면 챔버에 대해 아는 게 없는 판에 통 안 움직인다며 고장났다고 단정짓는데, 공돌이 맞나 싶더군요. 기술자란 놈이 저토록 손질 많이 해야 하는 헤어스타일을 유지하려 애쓴다는 것부터가 좀 텄다 싶기도 합니다만. 이 친구는 참 충동적인 편인데요, 1화에서 챔버를 차거나 치면서 아파하는 걸 보면 진짜 단세포 같더라고요. 에이미가 졸라대니 리짓에게 깨질까봐 두려워하면서도 정비실 문을 열어주고, 레드한테 유난히도 적대적인 언사를 취하던데 자칫 잘못하면 본전도 못 건지게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에이미한테 흑심을 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피니온은 급한 나머지 화재경보기를 킨 다음 리짓에게 보고를 때리던데요, 젊은 보좌관의 권위가 보통이 아닌 것 같더군요. 챔버의 인양과 해체에 대해 하나하나 인증받고 부가조건을 달자, 베로스와 피니온이 불평을 쏟아내는데 선단의 실질적인 시어머니라 할 수 있겠죠. 에이미를 특사로 파견한 안건도 그녀가 반쯤 독단적으로 처리한 것 같고요.
그리고 아직까진 레드의 유일한 아군이라 할 챔버를 보면 이래저래 일심동체나 다름없는 단짝이라 할 수 있죠. 이 친구가 레드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연출된 영상을 보면 제 주인이 조종석에서 나온 후 걸어가던 진로를 짚어가며 다시 돌이켜보고 있더라고요. 레드는 기체에서 나올 때 계기판 노릇을 하던 장치를 태블릿 PC의 패널처럼 따로 분리해선 개목걸이 마냥 조종복의 칼라에 부착해 챔버에게 지시를 내리는 무전장치로 이용합니다. 이 기기가 챔버의 머리와 흡사하게 생겨서 앙증맞더라고요. 챔버가 말할 때 눈이 점멸하는데, 작중의 인물들보단 시청자들을 위한 배려라고 봐야겠죠. 입이 없는지라 이런 식으로라도 말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야 하거든요.
챔버는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던데, 안에 탄 놈 내리라 했더니 불명이라 통역하는 거 하며 에이미가 자신을 감히 원시기계인 융보로에 비교하자 저 물건보다 무지 세다고 단호히 말하며 나름 재밌게 자아를 표출하더란 말이죠.
레드와 챔버의 관계를 보면서 ‘풀 메탈 패닉’의 소스케와 인공지능 알을 연상하는 분들도 계시다건데, 배경과 정체성이 비슷하긴 하죠. 제작진도 챔버는 레드에게 있어 단순한 도구를 넘어서는 동반자라고 공인하던데, 에이미가 챔버를 보고 칭찬할 때 살짝 웃는 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나마 잡담도 나누고 약간이나마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며 정든 낌새를 내비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죠. 자신의 애병이 유일한 친구라, 골수 군인답달까요. 소스케가 훗날 알과 나름 끈끈한 전우가 됐듯이 레드도 챔버의 지원 하에 가르간티아에서 적응하며 인간적으로 변해갈 듯합니다만…. 여담입니다만, 사실 ‘풀 메탈 패닉’의 소스케가 원래 소련의 암살자로써 적대진영의 게릴라 두목을 죽이려다가 잡히고 감화되면서 오히려 옛 상전들한테 총을 겨눈 과거는 ‘레드 스콜피온’에서 돌프 선생이 연기한 떡대 특수부대원에서 모티브를 딴 것 같단 말이죠. 80년대에는 인간병기가 딴 세상 사람들과 살면서 인간으로 거듭나는 액션물이 참 많았던 것 같아요.
레드는 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의 아니게 성희롱을 범하기도 하고, 모범시민이자 FM군인답게 조국에 득될 방안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에이미야 참 말랐다고 했지만, 이 처자를 한 팔로 업고서 날라다니는 꼴을 보면 머신 캘리버 조종술만이 아니라 특수부대원 못잖은 육체능력도 지녔다고 봐야겠죠. 그런데 레드가 챔버만을 의지하거나 군인으로써 다양한 능력을 활용하는 건 최전선에서 오래도록 복무한 PTSD의 흔적이라 간주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화 서두에서 잠깨자마자 적부터 찾는 거 하며, 가르간티아의 주민들을 보며 총력적이란 개념조차 모른다며 낯설어하는 게 참…. 그는 스스로를 군인이라기보단 병기이자 집단의 톱니바퀴로만 인식하고 있던데, 본인은 더욱 효율적인 전투요원이 되고자 잡스런 요소들을 쳐냈으며 자신의 고향에서 영위할 휴가에 대해서도 흥미가 동하질 않는다는 말까지 합니다. 자신의 존재의의가 전쟁터에만 존재한다고 하던데, 보기보다 심각하죠.
그리고 이런 병사를 주민들이 백안시하다가 2화 말미에서 진가를 확인하고선 경악하는 과정을 감상하자니 ‘퍼스트 블러드’의 람보가 자신을 짐승 취급하는 자들과 부대끼던 상황이 떠오르더군요. 에이미의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건대, 물속에서 건져낸 놈이 참한 처자를 납치했다고 서양공포영화에 나오는 다곤족 같은 괴수로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만 뭐 주민들이 보기엔 레드와 챔버가 미지의 괴물이나 다름없기야 하겠죠.
헌데 기이하게도 레드는 자기 자신이 한 말과 달리 인간성을 아예 내치진 않았죠. 그의 상관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1화 아이캣치에서 나온 레드의 소지품들 중 사적인 물건은 히디어스의 돌기밖에 없던데, 1화에서 취침할 때도 조종석 안에 떠다녔고 피니온이 떼낸 돌기도 줍더라고요. 신기한 노릇이죠. 동맹의 국민들은 섹스와 여가 생활을 통제받는 데다 잠자는 시간에도 수면계발학습을 받아야하는 걸 보건대 오락행위도 통제받고 있을 확률이 커요. 그런데 레드는 특이하게도 적대생명체의 이빨 혹은 돌기라 추측되는 물건을 갖고 틈만 나면 오카리나를 만들려 한단 말입니다. 누구한테 혹은 어디서 이런 취미생활을 배운 걸까요? 게다가 돌기에 빵구낼 범위가 표시돼있던데, 남이 그려준 걸까요?
나아가 그는 히디우스와 죽어가는 전사들을 보며 분노를 내비치기도 하고, 전우들을 위해 제 몸을 내던지기도 합니다. 이토록 철저한 관리체제 하에서도 인간의 정신은 온전히 통제하질 못하나 보죠? 생전 처음 보는 데다 자신에게 해를 가할지도 모를 족속들에게 살상행위를 안 가하고자 나름 애쓰면서 도덕관념이랄까 최소한의 선을 지키려 하던데, 엄밀히 따지면 레드가 표류자 신세가 된 것도 이와 같은 인간성에서 비롯된 셈이며(혼자 시간 끌겠다고 나섰다 공간이동에서 떨려났으니까요.), 나름 싹수가 있었던 게죠.
I see you
에이미는 특사 노릇을 할 때 이전과 달리 벨트에 권총집을 달고 있던데, 아마도 리짓을 비롯한 주변인물들이 쥐어줬을 겁니다. 레드와 에이미가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퀀스는 여러모로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더군요.
‘아바타’에서 주인공 제이크 설리는 판도라별의 야외에서 첫날밤을 지샐 때, 문명의 소산이라 할 도구들을 잃고 인위적으로 만든 불마저 날려먹고 나서야 다채로운 빛깔로 수놓인 판도라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접하고 만끽할 수 있었죠. 그리고 밤이 깊어가면서 새로이 접한 문명에 한층 다가설 계기를 얻었고요. 본작에서도 이 단락을 통해 비슷한 향취를 풍기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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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와 레드가 교섭을 치를 때, 레드는 에이미에게 다가서며 태양을 가르듯 한가운데에 서고 두 사람의 얼굴에 비친 그늘은 얼굴과 몸을 반쯤 비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이미는 생선회를 건네줄 때 해롭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자 두 번이나 반 토막을 내며 한쪽을 자기가 먹죠. 이와 같은 미장센을 통해 소년과 소녀가 경계에 선 채 위태롭게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후, 곧 해가 지자 별빛만이 하늘을 밝히는 밤이 무르익습니다. 레드에게 있어 새벽이 진실을 확인하는 시간이며, 낮이 뜻밖의 존재를 인식해가는 시간이었고, 해질녁이 경계의 시간이었다면 밤은 양측이 좀 더 터놓고 소통하는 교류의 시간입니다. 양자를 구분 짓고 가르던 빛 그리고 그늘이 거의 사라진 시간인 동시에 두 문명이 몇 안 되게 감상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인 별빛이 세상을 비추니까요. 야밤의 바다에서든 진공의 우주에서든 별빛은 어둠속을 나아가는 지침판 노릇을 합니다. 레드가 자신의 출신에 대답하고자 하늘을 가리킨 직후, 별이 찬 밤하늘로 전환되는 장면은 이런 요소들을 보강하는 연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윽고 레드는 미지의 바다를 경이롭게 바라보다가 이 벼락이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서 저도 모르게 자신의 옛 터전이자 지침표라 할 밤하늘을 올려보죠. 이때, 레드가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보고 좌표를 좀 더 확실하게 잡아낼 근거가 되지 않겠냐고 챔버를 보챈 시퀀스가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이 바다의 주민들이 자기들 갈 길을 정하는 기준을 알아낸 순간, 레드 자신도 새로운 길잡이 별을 찾아낸 셈이거든요. 허탕만 쳤지만서도요.
쫓기고 몰리던 레드와 챔버가 자리 잡은 곳이 다름아닌 여타 배들과 연결할 때 쓰이는 크레인이었죠. 이는 내몰린 끝에 필연적으로 교섭을 비롯한 교류활동을 취해야만 하는 레드 일행과 가르간티아의 주민들이 처한 상황을 받쳐주는 미장센인데, 에이미가 이를 가동해 반으로 접혀있던 크레인을 펴는 행위 즉 크레인을 다른 물체와 접속 가능한 상태로 변형시킨 과정 자체가 의미심장합니다. 에이미가 레드에게 한발 더 다가서며 밀접하게 부대끼고 있다는 뜻이며, 나아가 그들을 미지의 세상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부각시키고요. 실제로 이때쯤부터 그녀는 지인들과 가까운 위치 즉 레드일행과 보초들 사이가 아니라 레드 일행보다 더 바깥쪽에 자리를 잡고 섭니다. 그리고 아까 레드가 그랬듯 그녀는 새롭게 확장된 크레인의 접합관절 바로 위편 즉 한가운데에 서있습니다. 레드가 애매한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서있었다면 그녀는 레드와 가르간티아를 비롯한 이 세상을 이어주고자 양자의 교차점에 자연스레 선거죠. 곧이어 크레인 끝으로 나아가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려 하고, 레드도 잠시 머뭇거렸다가 쫓아가지만 아직 확신을 못했는지 챔버와 에이미 사이에 멈춰섭니다.
에이미가 참 요란하게도 경이로운 심정을 표현하자, 날다람쥐는 다급히 매달리고 레드는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솔직히 저도 참 희한한 애란 생각이 들더군요. 이 소녀는 타의나 속된 계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순수하게 레드와 챔버에 대해 알아가고자 합니다. 레드는 모르는 듯하나, 그가 마음의 빗장을 조금이나마 열고 챔버가 인공지능이란 사실을 공개한 것도 이 때문이죠. 하지만 소년과 소녀가 나름 거리를 좁혀가긴 해도 이들의 처지와 내면의 괴리는 아직도 컸어요. 에이미는 별똥별을 감상의 대상으로 보지만, 레드 일행에게 있어 이는 절박한 상황을 타파할 동아줄에 불과했던 것처럼요.
하늘사람과 바다사람들의 만남
1화 제목이 여러모로 기막히죠. 레드가 가르간티아의 주민들을 처음 보고서 미개한 표류부족이라며 업수이 여겼더니, 막판에 그 자신이 표류자 신세였다는 게 밝혀지거든요. 재밌게도 이 작품에 나온 단체들 및 구성원들은 크게 보면 모두 표류집단이자 표류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주를 표류하던 집단에 속해있던 주인공이 본의 아닌 표류 끝에 이른 새 둥지 역시 지구의 바다를 표류하는 선단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뜻밖의 표류가 문명의 충돌 혹은 소통을 자아내기에 이릅니다. 본작이 이를 묘사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더군요. 두 문명의 언어를 다르게 설정해 본작의 흐름과 주제를 그럴싸하게 보완하고 있어서요.
챔버가 워낙 신기한 물건이라 구경나온 주민들이 한 명 한 명 자리를 뜰 때, 챔버는 이들이 미지의 언어를 구사한다고 지적하는데 시청자들 입장에선 소리가 퉁하게 들려서 실감이 안 났죠. 그래서 잠시 후 벌어질 소통의 마찰과 이를 연출한 시퀀스가 한층 당혹스럽게 다가오며, 이로 인해 레드와 주민들의 심정에 공감할 여지가 생기죠.
레드가 자신이 우주에만 있는 줄 알고 주민들을 표류부족이라 단정짓는 거나, 주민들이 챔버 즉 머신 캘리버를 자기들 기준대로 융보로라고만 부르는 걸 보면 문명의 차이에서 비롯된 선입견이란 생각보다 큰 오해를 낳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복 미착용, 이상적인 중력과 향취가 진하게 밴 공기, 구식 기기와 마구잡이로 지은 듯한 실내공간…. 시청자들은 이런 요소들을 접하며 레드보다 앞서 상황에 대해 눈치 챌 수 있었죠.
해가 막 뜨며 그때껏 그늘에 잠겨있던 레드와 함선을 비춘 순간, 소년은 자신이 딛고 선 환경을 돌아보며 놀랍니다. 뜻밖의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걸 참 극적으로 묘사해 레드의 경악감을 은유하면서도 시청자들의 긴장을 적절하게 자극하죠. 그 직후, 챔버는 레드의 뒤편 즉 태양을 가리는 위치에 내려서면서 이 기계야말로 소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진실을 확인시켜준 태양과도 같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뭐니뭐니해도 이 작품에선 시청자들에게 어느 쪽의 입장과 관점을 이입시키느냐에 따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의 주체가 변한다는 점이 강렬하게 와닿더군요. 레드 그리고 에이미를 대표로 한 가르간티아의 주민들이 부딪히거나 맞물릴 때 어느 쪽의 관점에 이입하게 만들지를 자연스레 유도한달까요. 서로에 대해 미지의 존재로 인식하는 두 군상들을 통해서 신묘하게 모순된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끔 도운 거죠.
그리고 문명이 교류하는 마당에 매개체가 될 인물이 안 납시면 섭하죠. 본작에서 레드와 에이미는 각각 두 문명을 개괄적으로 시청자에게 소개하는 매개자인데, 에이미는 작중에서도 전방위로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이어줍니다. 가르간티아에선 통신기기를 널리 보급할 기술력을 보유 못했는지 부서간의 연락도 전문인력을 통해 실시하는데, 개중에 에이미는 레드가 오기 이전부터 주민들을 이어주던 존재답게 레드와 다른 이들의 의사소통을 도맡다시피 합니다. ‘아바타’의 제이크 설리도 나비족과 인간들말고 다양한 인물들의 징검다리 노릇을 했는데, 이 처자는 날틀을 타거나 계단 혹은 길이 아니더라도 발만 닿으면 팍팍 뛰댕기며 전서구노릇을 합니다. 그녀가 다른 배달부 친구들과 달리 유일하게 제 가방에다 커다란 깃털을 달고 다니는데다, 슬쩍 슬쩍 활공하는 날다람쥐를 키우며 감정이 고조되면 옷 사이로 두 팔을 넣고서 날개짓하는 버릇마저 있더군요.
리짓이 에이미를 호출해 레드의 본질에 대해 물어볼 때, 기이하게도 이 소녀와 피니온만 응달에 서있었고 다른 이들은 양지에서 레드 일행을 관찰하며 논의를 거듭했죠. 이는 에이미와 피니온만이 레드와 챔버의 처우에 대해 확고한 결단을 내렸다는 점을 강조하는 대비연출인 동시에 에이미만이 미지의 존재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걸 짚어주는 대목입니다.
본작의 1, 2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바로 매개자라 할 수 있는데, 챔버의 통역행위 그리고 중개자 노릇을 하는 에이미의 직업도 그냥저냥 갖다 붙인 요소가 아니더라고요. 챔버는 위태로운 긴장관계에서 레드를 받쳐주기 위해 다양한 조사를 실시하며 두 집단의 말을 통역하며, 에이미는 난데없이 레드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접촉한 탓에 사건의 관계자들 및 실질적인 담당자들에게 불려가 그에 대해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이전부터 타인의 정보와 뜻을 전달하는 직업에 종사했으며, 이는 작중에서 저도 모르게 레드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그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애쓰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합니다. 선의와 일종의 직업정신이 맞물린 건데, ‘킹콩’의 주인공 앤이 그랬듯 에이미 역시 원체 별의별 군상들을 다 만나보며 징검다리 노릇을 하고 살았기에 레드에 대한 편견이 비교적 적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레드와 가장 가까이 그리고 빈번히 접촉했기에 다른 주민들보다 그나마 소년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특유의 활기찬 아량만이 아니라 평소 행실 덕분에 짧은 시간동안 소년의 난감한 속내를 짚어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에이미만이 아니라 작중의 주요인물들이 매개자로써 기능하거나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장면들이 종종 나옵니다. 이 뜻밖의 조우와 관련된 당사자들은 각자 본의 혹은 타의로 인해 자신의 이웃이나 직장동료들과 현재 상황에 대해 논의하며 레드와 챔버에 대한 정보를 확산시키죠. 수리공 청년께서 주민들에게 시달리는 거하며, 에이미가 직장동료라 할 친구들과 동생에게 레드에 대해 설명하고 리짓이 그의 처우에 대해 논의하는 단락들을 통해 본작에서 매개자란 존재가 차지하는 비중 그리고 2화에 걸쳐 소개된 문명의 충돌이 단기간에 끝날 소재가 아니라 작품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될 거란 복선을 제시한 겁니다.
그리고 이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 할 에이미의 역할만 강조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레드가 떠맡을 역할에 대해서도 암시합니다. 레드는 현재 두 문명 중 한쪽을 대표하는 존재나 다름없지만, 그는 장차 자신과 주민들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건 물론이요 구난신호를 받고 찾아올 고향 친구들과의 관계도 새로이 정의해야 하겠죠. 지구인들과 아발론의 구성원들 사이의 매개자 노릇을 해야만 할 테니까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인 방면으로든요.
깍두기…
본작의 제작위원회 이름이 오케아노스인데, 이는 가르간티아 선단의 지휘선 이름이기도 합니다. 세상 끝의 바다라…. 본작의 배경과 레드가 처한 상황에 딱 맞죠. 다만 아발론과 오케아노스란 명칭이 나오니 각본가인 우로부치 대인의 전작이 생각나더라고요. 주민들이 화약식 자동화기를 보유하고 있는데, 톰슨 기관총과 마우저 자동권총같은 골동품도 보이더군요. 총덕후 선생께서 또 자기 취향을 불태운 탓이려나요? 여러분, 동인지, 상업지(잉?), 일반작품 할 것 없이 섭렵한 나나코 선생이 등장인물들을 동글동글 귀엽게 구상했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이전에도 아오키 선생이 똘망똘망한 캐릭터를 그려줬더니 이 양반이 아주 빅엿을 먹였잖습니까? 게다가 특정 사이즈가 바람직한 처자들께서 은근슬쩍 많이 나오던데…. 에비지지. 오해 마세요. 앞날이 훤한지라 살풀이 굿이라도 해야겠다 싶거든요.
그밖에도 저 날틀은 공짜로 이용하는 표준 이동기구인가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애초에 저 동네에 화폐경제가 존재하기는 할는지도 아직은 의심스럽습니다만…. 그리고 저 대표 영감님의 머리스타일이 낯익은 데다가 우주에 대해 언급하는 걸 보면 레드의 옛 상관 같다는 의혹이 샘솟더군요. 과연….
좌우간 레드 일행이 지구에 일으킨 나비효과는 생각보다 막대합니다. 챔버가 통제 못할 신문물이란 걸 알게 된 베로스는 공무원인 리짓이 공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이 물건을 독차지할까봐 작업선만 따로 떼어내 뒤졌던 지역을 다시 들쑤시러 나갔죠. 이때 챔버를 째려보던데 또 다시 비슷한 왕건이를 건져낼 수 있을지 모른다고 봤던 겁니다. 그로 인해 고립된 상태에서 해적들의 습격을 받았고, 레드와 챔버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외따로 떨어진 존재인지 확인할 계기마저 빚어냈습니다. 해적들을 비롯한 다른 선단에도 소문이 쫙 퍼질 테고, 가르간티아호는 물론이요 온 바다가 한바탕 들썩이겠죠. 2화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 섬찟했어요. 피와 살이 튀는 고어물보다도 훨씬 끔찍하고 잔인한 느낌이 들던데, 그냥 지워버린달까 치워버리는 것 같은 전투행위를 보면서 각본가 선생의 악명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흐미.
챔버의 무시무시한 화력과 적은 곧 버러지라 보는 레드의 사고체계가 기어이 시청자들과 가르간티아의 구성원들이 이들에게 품은 인식마저 뒤집고 맙니다. 미지의 위험대상에서 걸어 다니는 핵폭탄으로 말입니다. 레드 일행이 마음만 먹으면 가르간티아에 쑥대밭을 일구는 것쯤 일도 아니란 걸 똑똑히 접수했거든요. 그토록 이해심 많던 에이미마저 저리 말하는 걸 보세요.
에이, 이러다 나중에 아발론에서 지구가 상당히 회복된 걸 알아채고 쳐들어오자 레드가 정든 가르간티아 주민들 편을 들면서 맞서 싸우는 클리쉐가 나오는 거 아닙니까?
간만의 ‘바다 이야기’ 혹은 상반된 문명의 충돌에 대해 흥미가 동하시는 분들께 본작을 추천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그럼...
P.S. 얼른 못 움직이나, 영원히 살 것도 아니잖나!! …영화판 ‘스타쉽 트루퍼즈’의 캐치 프레이즈고 후속 애니에서도 두고 두고 써먹는 문구인데, 요새 자꾸만 공감이 갑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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