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본 3부작 - 세례를 통한 재탄생 천기누설 겸 감상

학교 갔다 하면 친구들과 어제 본 TV방송에 대해 떠들던 시절 한 외국 특집 드라마 갖고 신나게 얘기를 나눴던 게 생각납니다. ‘저격자’란 단편 드라마의 원제가 바로 ‘본 아이덴티티’였으며, 멧 데이먼 선생이 주연한 작품과 같은 원작에서 파생된 결과물이란 거야 머리 좀 굵고 나서 알았죠.

천기누설이 있으니 주의하시길.


사실 이번에 감상을 정리하고자한 작품은 근자에 개봉한 ‘베를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 대해 간단한 감상을 정리하려다 보니 이전부터 제이슨 본 씨리즈에 대해 품고 있던 생각이랄까 감상도 절로 떠올랐습니다. 제이슨 본 3부작(본 레거시? …그런 작품도 있었던가요?)은 21세기식 첩보물에서도 독보적인 시리즈로 꼽히며, 원작의 뿌리 중 하나인 제임스 본드 씨리즈의 리부트를 비롯한 수많은 액션 스릴러물에 큰 영향을 끼쳤죠. 칼리 혹은 에스크리마라고 불리는 무술과 온갖 소품을 이용한 치 떨리는 전투방식, 현장감 넘치는 추격전과 첩보원들의 팽팽한 두뇌싸움… 덧붙이자면 미국첩보원이 외국 나가서 ‘영어’가 아니라 현지 언어로 소통하는 몇 안 되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음. 좌우간 이 시리즈에 대한 감상부터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졸문을 두드리게 됐습니다.

이 작품의 영향력은 ‘아저씨’와 ‘베를린’같은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재밌는 건 제이슨 본이란 주인공 이름만 봐도 아시겠지만, 원작 자체가 제임스 본드 씨리즈에 대한 오마쥬와 안티테제와도 같은 작품인데-늘 여유롭게 상황을 주도해나가는 영국첩보원 007과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늘 급박하게 좌충우돌해야만 하는 본의 대조성만 봐도 알 수 있죠-이 작품을 영화로 만든 본 3부작이 오히려 새 007시리즈에 영향을 끼쳐 007특유의 공식마저 여럿 뒤틀어놨다는 겁니다.


전 개인적으로 액션씬이나 추격전 및 두뇌전보다 주인공이 늘 후진 차 타고 쫓긴다는 점, 그리고 어딜 가든 지도부터 챙기며 그 후엔 사방의 지리를 싹 꿰는 점이 기억에 남곤 했습니다. 신선해서 그랬겠죠. 아, 물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추적과정도 볼만 했죠. 그리고 물에 풍덩 빠지는 장면들도요.

 

 

Identity

 

본작은 주인공의 이름(정확히는 암호명)을 제목으로 내세운 작품답게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큰 줄기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제이슨이 1편에서 자신의 여권을 찾았을 때 제일 먼저 접한 이름이 바로 제이슨 본이며, 좀 있다 수많은 여권과 이름을 찾아냈지만 그가 시리즈 내내 내세우는 이름은 바로 제이슨 본밖에 없습니다. 2부 말미와 3부 중턱에 자신의 본명이 ‘데이빗 웹’이란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고요. 제이슨 본이란 이름의 근본 중 하나가 007이라 앞서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밖에도 최초의 배회증 환자로 기록된 안셀 본(Ansel Bourne)에서 땄다는 의견을 접한 적이 있답니다. 안셀은 한때 모든 기억을 잃고 브라운이란 이름을 대며 살아갔다가 석달 후 원래 이름과 기억을 되찾은 순간, 브라운이란 정체성과 삶을 모조리 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행적에 관해선 아무도 모르는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Baptism

 

본(Bourne)이란 성씨는 원래 목적지 혹은 한계와 경계를 뜻하는 말이죠. 이름 그대로 제이슨은 자신의 종착지를 몰라 이리 헤매고 저리 방황하며 온갖 경계를 넘나들다가 막다른 골목에 직면하곤 합니다. 본이란 말은 시내나 개울을 뜻한다고도 하는데, 그러고 보면 제이슨은 각 부마다 꼭 한 번씩 물에 빠졌다 가까스로 살아나곤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이 그에게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하곤 하죠. 헌데 전 이 장면들을 보면서 출산장면 혹은 세례식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세례식 하면 갓난아이들을 살짝 물에 담거나 혹은 신자들 머리를 적시는 성사가 떠오르곤 합니다. 그런데 실제 세례는 강물과 시냇물처럼 흐르는 물 즉 살아있는 물에 몸을 확 담갔다 나와야지 그 밖의 의식은 약식에 가깝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몇 몇 종파는 이를 고수하고요. 세례란 막 신자가 될 이들의 죄를 사하고 과거를 떨어내며 신도로써 새롭게 태어나는 의식이죠. 세례 요한 덕분에 참 큰 성사로 자리 잡기도 했고요. 세례의 과정 자체가 양수가 담긴 태중에서 나오는 태아의 출산과정에서 어느 정도 따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서양의 창작물에선 세례를 종종 개인의 재탄생으로 인용하곤 합니다. 사이버 시대의 예수라 할 수 있는 안덕삼(…) 선생도 매트릭스에서 처음 깨어났을 때 요상한 액체가 담긴 캡슐에서 덜컥 일어났다가 폐기처분되듯 또 다른 하수시설에 퐁당 빠졌더랬죠. 그 직후에 세례 요한이라 할 모피어스가 와설랑 물에서 꺼내주며 ‘진짜 세상에 온 걸 환영한다.’라고 일러주고요.

제이슨 본 역시 새로이 태어나곤(Born) 할 때 물맛을 톡톡히 보곤 합니다. 1부에선 자신이 기억을 잃고 바다에 떠있던 이유가 암살작전에 투입됐다가 내면의 갈등 때문에 이를 수행하지 못한데서 비롯됐다는 게 말미에 드러나죠. 그는 인간흉기로써 부여받은 임무를 거부한 순간 주어진 정체성 또한 내친 셈이고, 이로 인해 기억을 잃어서 원치 않은 자신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할 기회를 갖게 되죠. …그래놓고 영화 내내 자신이 원래 누구였는지만 찾아다니다가 안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교훈만 얻는다는 것도 거식하지만요. 2부에선 추적자를 피하다가 연인과 함께 강물에 빠지며, 그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나아갈 길을 정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보다 깊은 과거와 본명도 약간이나마 알아내는데 성공하죠. 3부에서도 세례 장면이 잊을 만하면 나옵니다. 그는 연인이 죽은 사건을 떠올리면서 얄궂게도 자신의 과거가 재창조된 순간 비슷한 경험, 즉 물고문을 치렀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깨닫습니다. 그는 애초에 국가의 세례를 통해 인간흉기로 거듭난 종자였던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진실에 대해 모두 알아낸 직후에도 물에 빠졌고, 이번에는 기운차게 헤엄쳐가며 시리즈의 막을 내렸죠. 이젠 데이빗 웹도 제이슨 본도 아닌 존재로써 떳떳이 살아가겠다는 듯이 말입니다….

 


 

Mirroring Rebirth


  이 시리즈의 포스터를 보면 말입니다, 본 아이덴티티는 헤매는 인상이 강하고, 본 슈프리머시는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하는 듯하며, 그리고 본 얼티메이텀은 이젠 더 두려울 게 없다는 듯이 아예 세상 그 자체를 당당히 마주 보고 있죠.

 

이런 식으로 나가단 끝이 없어.

우리한텐 선택의 여지가 없어!

…아니, 있어.

제이슨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해준 연인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죠. 그녀는 당시 생존을 위해(그리고 그녀의 안위를 위해) 제이슨이 도망치기에만 급급하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제이슨은 1부에선 1차적인 정체성(Identity)과 생존을 위해서만 싸웠나갔습니다. 2부에선 연인을 지키고자 정체성 탐구마저 내던지고 달아나기만 하다가 그녀마저 잃고서야 자신이 과거를 잊으려 해도 과거가 자신을 안 잊는다는 진리를 깨우쳐 자신의 존엄과 주권 혹은 축(Supremacy)을 지키고자 정면대결에 나섭니다. 3부에 이르러선 말 그대로 자신의 꼭대기 끝까지 거슬러가 정체성에 대한 최후통첩(Ultimatum)을 듣죠.

 

왜 그 때 날 안 쐈지?

그러는 널 날 쏴야 할 이유를 아나?

우리 꼴을 봐. 저들이 만들어놓은 우리 모습을!

자아탐구담의 주인공들이 늘 그렇듯 제이슨 역시 신화의 공식을 착착 밟아갑니다. 넓은 황야가 아니라 깊은 미궁을 헤매다가 끝에 가서 괴물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자 혹은 또 다른 자신과 맞닥뜨리죠. 그가 맞서 싸운 조직 역시 자신을 재창조한 소속집단이며 적대자들 대부분은 자신처럼 재창조된 인간흉기들 즉 또 다른 자신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완결편에서 그는 창조주를 만나 자원해서 세뇌훈련에 지원해 거듭났다는, 끔찍하고도 어이없는 진실을 접하죠. 결국 그는 지금도 과거에도 이름만 달랐을 뿐이지 스스로의 정체성을 똑바로 버텨내지 못한 인간이었던 겁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미래를 스스로 결정짓기 두려워 타인에게 국가에게, 자기보다 잘났다고 생각되는 이나 자기보다 더 큰 존재라고 생각되는 조직체에 모든 걸 떠맡긴 인간. 그렇듯 나약했던 인간흉기가 자신을 만들어낸 창조주, 자신을 통제하려 드는 상전, 자신의 보금자리이자 감옥과도 같던 집단에 저항하며 비로소 자기만의 힘으로 세상에 똑바로 맞설 용기와 자존감을 갖추기에 이릅니다. 이로 인해 제이슨 본은 3부에서 또 한 번 죽고 다시 한 번 재탄생합니다.

 

3부 마지막 장면은 1부의 도입부와 유사하면서도 확연히 다릅니다. 1부에선 그저 정처 없이 모든 걸 잃고 흘러가다가 타인의 손길에 의해 구원받았죠. 그러나 3부에서도 처음엔 1부처럼 힘없이 가라앉는 듯하다가 곧이어 아기가 걸음마를 하듯 서툴면서도 힘껏 발을 저으며 나아갑니다. 애초에 1부 및 2부와 달리 3부에선 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뛰어내린 거였으니, 조직의 인간병기도 나약한 군인 데이빗 웹도 아닌 새로운 자기 자신을 일궈가겠다는 듯이 말입니다. 글쎄요. 애초에 제이슨 본이란 이름과 존재방식 역시 타인이 부여한 것에 불과했지만, 3부작 내내 이를 거부하고 다른 제이슨 본으로 자기 자신을 가꿔가고자 치열하게 싸웠으니 이미 그 어느 쪽과도 다른 인간이 됐다고 자부해도 될 듯한데 말입니다.

‘베를린’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려다가 이거 또 길어졌군요. 다 아시는 이야기를 한 게 아닌지 원. 사실 ‘베를린’에선 영화의 형식 이전에 인물들의 흐름과 변화에서 본 시리즈와 흡사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이에 대해서 차후 간단히 말씀드리도록 하고 이만 줄이겠습니다.

 

그럼...


덧글

  • 이름없는괴물 2013/01/31 00:38 # 삭제 답글

    좋은 감상글을 즐겁게 읽다가 마지막 아기 짤방에 뿜었습니다. ㅋㅋ
  • zemonan 2013/02/01 20:47 #

    덧글에 감사드립니다. 너바나, 아니 니르바나라고 해야 하려나요? 정말 여러모로 대단한 양반들이었죠.
  • 신화만세 2013/01/31 04:44 # 삭제 답글

    전 이 영화에서 맷 데이먼이 나온다는 건만 알고있죠. 물론 2편의 러시아에서의 추격씬은 본적은 있지만 말입니다. 혹시 사극도 보시나요? 그것도 분석해보면 꽤 재미있을텐데... 그리고 사극은 역시 kbs가 제일 최고이더군요. 물론 천추태후부터 시작한 막장 사극은 그냥 생각하기 싫지만요....
  • zemonan 2013/02/01 20:48 #

    사극은 요새 잘 안 보고... 미드 몇 편을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본 적은 있죠. 음. 본 레거시는 흥행이든 평가든 좀... 멧 데이먼 선생과 감독양반들이 다크나이트 시리즈의 각본가 중 한명인 조나단 놀란을 찾아가고도 답이 없어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더군요.
  • malebolgia 2013/02/20 23:55 # 삭제

    사극 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작품은 신뢰성을 잃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아니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가치를 상실했다고 봐야 정확하다고 할 것입니다.
  • zemonan 2013/02/22 01:23 #

    다른 건 몰라도 요새 영화계에서 심심찮게 표절논란이 이는 걸 보면... 한국영화업계도 블록버스터의 공식에 나름 충실하려고 애쓰는 듯합니다만, 좀 다른 자구책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 신화만세 2013/01/31 04:47 # 삭제 답글

    본 레거시라... 그때 멧 데이먼이 안 나와서 짝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흥행했을라나요?
  • 잠본이 2013/01/31 21:22 # 답글

    물에 정말 자주 빠진다 생각했는데 세례와 연결지어 보니 독특한 느낌이 드는군요.
  • zemonan 2013/02/01 20:50 #

    극장에서 3부를 보고 저 장면이 현실에서든 머릿속의 과거에서든 반복되는 걸 보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1부와 2, 3부의 감독이 다른 분이라고 하던데, 용케도 하나로 이어냈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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