캅 크래프트 - 가토 쇼우지의 하이브리드 경찰 드라마 천기누설 겸 감상

얼마 전 ‘풀 메탈 패닉’을 완결지은 가토 쇼우지 선생이 ‘캅 크래프트’란 신작을 냈더군요. 형사물과 판타지 장르를 조합한 얼개에 주인공들이 취향에 맞는 부류들이라 주저 않고 읽었죠.


 

당연하게도 전작에 대한 기억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는데, 가토선생은 '풀 메탈 패닉'에서도 판타지 장르와 하드보일드물에 대한 애호심을 드러내곤 했죠. 미스릴이란 조직명이나 아바레스트, 레반틴같은 기체명들도 그렇고, '풀 메탈 패닉'에서도 구식느와르에나 어울릴 법한 군상들이 종종 나왔답니다.

사실 전혀 다른 성장배경을 지닌 남녀가 소정의 목적하에 만나서 함께 난관을 타파해가며 가까워진다는 얼개만 해도 ‘풀 메탈 패닉’과 흡사한 구석이 많긴 합니다. 하지만 가토 선생 작품 아니랄까 고정관념을 깨는 순간도 적지 않죠. 티라나는 현대 도회지의 형사로썬 애송이지만 프로전사다운 면모를 종종 내보이고, 파트너인 케이는 나름대로 연륜이 있으면서도 잊을 만하면 철부지같이 쫀쫀하게 굴더군요. 케이의 수사방식도 그런 면모가 돋보입니다. 외양과 사고방식은 발로 뛰는 구식형사 같은 인상을 풍기지만, 모바일 기기로 네트워크를 검색하거나 디지털 감시카메라로 용의자를 확인하는 식으로 디지털 시대의 형사다운 풍모를 피로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옛날 형사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뛰어다녀야 했기에 피곤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풀 메탈 패닉'에서도 주인공이 속한 조직이 사설 군사단체인데도 미국 혹은 유럽이 아니라 호주에 본부가 있는데요, 이전과 달리 디지털 네트워크가 어마어마하게 발전한 덕을 봤기 때문이라나요? 굳이 최전선에 본부가 자리잡고 있어야 할만큼 연락체계와 조직망이 허술한 시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2권 후반의 개그는 역시나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군요. 해준 만큼 당하는 복수의 법칙도 맛깔나게 구성했고요.


난 미치도록 화가 난다. 왜 그런지 아나, 쪽바리(Jap)?

차별적인 비하명칭 아닙니까?

시끄러! 난 일본이 좋아. 친구도 많고. 하지만 전 세계 모든 일본인 중에서 너만은 쪽바리다. Tiny Tiny Fucking Jap! 차별당해도 할 말 없는 놈 같으니!

너무 속상해하지마, 케이.

닥쳐라, 외계인! 내 쿠퍼를 부숴놓고 그따위 말이 나와!

차별적인 비하명칭 아냐?

시끄러! 전 세계 세마니인 중에서 너만은 외계인이야! 차별받아 마땅할 만큼 썩어문드러진 외계인! Tiny Tiny Fucking ET.

서두에선 ‘풀 메탈 패닉’의 외전에서 마오가 새내기들 스카웃할 때 겪었던 반복개그가, 말미에선 쿠르츠랑 소스케가 무단으로 동원했던 AS를 말아먹는 거랑 비슷한 개그가 나오는데, 이 에피소드를 읽다가 몇 번이나 깔깔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구성 해서 생각난 건데, 다시 읽어보니 두 권 다 서두에 복선이 나오더군요.

좀 있다 만나기로 약속 잡았거든

여자랑?

뭐, 그렇지.

부럽드아. 난 울 마누라랑 1주일동안 말도 못 붙이고 있구만.

부럽기는 쥐뿔. 같이 있으면 서로 찌르기 바쁜데.

야, 남녀 사이란 게 그따위 자극이 오가야 장땡이지.

폐차장. 여기는 자동차 무덤이다. 모든 차가 프레스기로 직행할 운명에 처해있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무덤에 가본 지도 한참 됐군.

심지어 2권은 에피소드가 둘로 나뉘어있는데도 두 가지 이야기를 모조리 함의하고 있는데, 절로 탄성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전작에 비해 영상화를 신경 쓴 구석이 많더군요. 물론 라이트노벨 자체가 만화나 애니를 글로 옮기는 식의 표현이 많은 장르긴 합니다. 작품이 히트쳐서 영상화된 덕에 이래저래 재미를 봐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그간에 애니 각본도 작성하셔서?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마다 무슨 양키 수사드라마처럼 소개말이 흘러나오는 게 참…. 근데 가상인터뷰나 에피소드 소개까지 넣은 건 과유불급이 아닐지. 희망사항을 너무 티내게 드러내는 것 같단 말이죠.

 

그리고 사실 본작은 ‘풀 메탈 패닉’이 완결되기 전에 출간했다가 여차저차해서 군데군데 수정해 다시 내놓은 작품인데요, 표지와 삽화마저 일신했더군요.

솔직히 좀 아쉬웠습니다. '쿠단시'와 '여름거미'의 작가 시노후사 선생이 그린 이전 표지가 참 멋드러졌거든요. 형사 케이와 기사 티라나가 제각각 자세를 갖추며 나란히 계단을 오르는 장면은 본작의 성격이 단적으로 압축된 그림이었죠.

그 양반이 만든 작품들이 판타지온라인게임이 배경이었기에 단순히 중세판타지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현대 도시 특유의 향취가 특징이기도 했죠.
 

당초부터 나름대로 현대 수사물과 중세판타지가 조합된 작품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삽화가를 골랐던 겁니다.


헌데 무라타 렌지 선생이 새로이 삽화를 담당하면서 느와르적인 느낌이 한층 강해졌어요. 티라나의 차림새와 외양도 전형적인 서구식 판타지에 가까웠는데, 동양적인 느낌이 들도록 일신했더군요. 기사 운운하면서 동남아풍으로 바뀐 게 요상하긴 합니다만… 배경인 샌테레사가 하와이와 비슷한 입지조건을 지녔고, 별세계인 세마니를 미국의 관점에서 본 베트남 내지는 아프간처럼 지구인들이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닥 어색할 것도 없겠죠. 그리고 두 인물들의 나이차가 확 벌어진 느낌도 듭니다. 따지고 보면 케이야 막 중견형사가 된 데다 부서의 실질적인 2인자이자 행동대장이니 나름 연배가 있는 게 당연하고, 재출간하면서 티라나의 연령을 좀 더 낮췄으니 이 편이 더 어울리긴 하죠.

 

 

형사버디물에 행차한 필립 말로의 후예

 

그는 스스로가 실의의 구렁텅이에 빠져 자기연민의 노예가 되는 게 제일 싫었다. 요새야 남자들이 그런들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기대서 부담을 더는 걸 욕할 심산은 없었다. 하지만 마토바는 제 영혼을 구원할 자는 자기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갈수록 아픔이 커지겠지만 자기 말고 다른 존재에게 구원을 갈구하는 순간 다시는 제 힘으로 버티고 서지 못하리라. 사나이의 존엄성은 피를 토하며 쟁취하고 지켜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힘든 길이란 걸 알면서도 그런 세상살이를 고집했다. 마토바는 한참 옛적엔 자연스럽게 존재했던 사나이들의 마지막 후예나 다름없었다.

본작의 배경인 샌테레사(San Teresa)시의 이름을 처음 봤을 때야 전작의 히로인 중 한명인 테레사 테스타로사에서 따온 건가 싶었는데, 철자가 다르더군요. 그러다 우연찮게 하드보일드탐정의 효시라 할 필립 말로의 고향이 산타로사(Santa Rosa)라는 걸 알고 허걱했습니다.

이전 삽화에선 주역인 케이 마토바가 형사보다는 후줄근한 회사원에 가까운 모양새를 지니고 있었죠. 근데 이번 삽화를 보니 전반적으로 하드보일드물의 탐정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가토 선생은 어느 인터뷰에서 밀리터리물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듣자, 하드보일드물을 제일 좋아한다고 밝힌 적도 있었죠.

사나이는 썩어문드러진 뒷골목을 나아가도 꺽이지 않을 만큼 강해야 하는 동시에 마음이 따듯하지 않으면 살 가치조차 없다던가요? 이런 낡아빠진 관념을 아직껏 고수하며 언행과 차림새로 드러내는 인간인 게죠.


티라나같은 소녀와 한지붕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직장에 알려지면 지금껏 쌓아온 강직하고 터프한 이미지가 산산조각 나리라. 직무상 파트너와 서로를 이해하는 거야 중요하지만 도가 지나치면 여차싶은 순간 정이 앞서서 판단력이 흐려진다. 이는 결코 달가운 노릇이 아니다. 적어도 구세대 경찰인 마토바는 그리 생각한다.

물론 이게 남자들 입장에서나 있어 보이지, 무지 촌스런 구석도 많죠.


세계에서 제일가는 미녀를 보듯 중얼댔다.

살 맛 난다. 내가 이 맛에 형사질 한다니까. 미안타, 저승으로 간 쿠퍼S. 난 10만불짜리 미녀랑 함께 살란다.

새차를 받아서 너무 들떴지 뭐야.

나 참. 왜 사내들은 자동차 하면 껌벅 죽지?

동감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니까.

한 예로 케이가 파트너 아가씨보다도 자동차에 열을 내는 단락에선 제 자가용에 눈이 뒤집혀서 여자보다도 함함하는 남자들의 슬픈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타고 다니던 쿠퍼와 관련된 추억을 떠올릴 때, 애인보다도 알싸한 게 거식하더라고요. 무슨 ‘전격Z작전’의 키트랍니까….

 

그리고 본작은 작중에서 케이가 언급했듯이 ‘리썰웨폰’씨리즈와 유사한 면모가 많습니다. 케이 자신도 멜 깁슨이 연기한 릭스처럼 참전군인 출신이며 간간히 귀환병 특유의 속앓이에 시달리는 것도 흡사하고요. 작중의 삽화를 보면 생김새도 닮았더군요. 다만 릭스보단 훨씬 멀쩡한 편이고, 막나가는 신참기질은 티라나가 전담할 따름이죠.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와 이라크의 선례가 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교활하고 강인한 전사들을 그저 야만인으로만 인식했던 것이다.

전반적인 배경을 보면 2차 화르바니 분쟁이라 불린 전쟁을 통해 현재 세마니와 지구의 관계가 그런대로 자리를 잡았는데, 이 또한 미국의 현대사를 여러모로 변화시킨 베트남 전쟁과 흡사합니다. 세마니에 쳐들어간 다국적군이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현지 마약을 너도나도 빨아서 뒤통수 맞는 양상이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세마니 마약이 나돌아다니는 꼬락서니가 참 낯이 익더라고요.

게다가 리썰웨폰 1편의 주역들과 악역들이 죄다 베트남참전군인이었듯이 본작의 주요인물들도 주역과 악역 할 것 없이 참전자들 아니면 이 분쟁으로 인해 인생이 뒤틀린 자들이더군요. 심지어 티라나마저 오빠가 지구쪽과 관련된 불충을 저지른 것으로 인해 죄의식을 품는 동시에 고정관념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단 말이죠.

전형적인 흑인반장인 짐머는 당연하게도(?) 성질 더럽고 제 부하들 갈구면서도 확실히 챙겨주는 양반입니다. 생긴 게 릭스의 파트너인 머터프 형사 같더군요.


물론 형사물 특유의 클리셰도 충실하게 나옵니다. 시체보관소에 가서 검시결과를 듣고, '좋은 경찰, 나쁜 경찰' 공식에 따라 용의자를 심문하며, 뒷골목의 큰 손 중 한명을 정보원으로 활용해서 잠입수사(UnderCover)같은 함정수사(이는 원칙적으로 금지돼있다고 합니다. 하지만…)를 펼치죠.


기실 본작은 작중에서 뭘뭘 베껴먹었는지 아주 대놓고 드러내더군요. 원래 제목이었던 ‘드라그넷 미라쥬’는 경찰드라마의 효시 중 하나인 ‘드라그넷’이란 미드가 모티브였죠. 수사망을 뜻하는 말인데, 이전까지 무능한 세금도둑으로만 나오던 경찰에 대한 인상을 바꿔준 시리즈중 하나랍니다. 하도 유명해서 영화로도 리메이크됐었죠.


그리고 1권 도입부에서 필리핀 갱이 파이브 오(5-O. 빵이 아니라 알파벳 O입니다.) 셔츠를 입고 나오는데, 필리핀이 한 때 미국 땅이나 다름없었다는 걸 상기해야 합니다. 본작의 배경인 샌테레사시도 공식적으로야 중립지대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51번째 주나 다름없거든요. 그러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미국 땅이면서도 아닌 듯한 애매하고도 이국적인 성향과 관광지란 속성은 미국의 50번째 주인 하와이와 유사하고, 그런 동네를 배경으로 한 경찰드라마란 점이 ‘5-0 수사대(Hawaii Five-O)’란 미드를 생각나게 합디다. 이 드라마도 고전 중의 고전으로 작년에 리메이크됐죠.


주역콤비가 몸담고 있는 조직명칭이 특별풍기단속박(Special Vice Squad)인데, 이는 마이클 만이 제작한 드라마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주인공들이 소속된 부서였죠. 위장수사가 전문이란 점마저 똑같더군요. 그러고 보니 이 드라마도 나중에 마이클 만 감독이 직접 영화화했죠.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풀 메탈 패닉’에서도 마이애미 시경이 나왔답니다. 사가라가 개발한 본타군의 구입처로요.

 

 


불청객이 몰고 온 문명의 충돌

 

15년전 태평양 상공에 미지의 초공간 게이트가 나타났다. 아지랑이 같은 게이트 너머로 요정과 마물이 사는 기묘한 별세계가 존재했다. ‘레토 세마니’.

두 세상의 인류는 분쟁을 거듭하면서 교류를 모색했다.

카리아에나 섬, 샌테레사 시. 초공간 게이트와 함께 태평양 상공에 출현한 섬과 그 북부에 건설된 소도시는 지구의 현관과 다름없었다. 200만이 넘는 두 세계의 이민자들, 다양한 민족과 다채로운 문화, 기득권자들과 빈자들.

세계에서 가장 새롭고 활기가 넘치지만 혼돈의 이면에서 숱한 범죄가 피어났다. 세마니 세계의 마법물품과 지구의 병기 및 약물이 밀거래되면서 유례없는 문명의 충돌을 자아냈다.

이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들은 항상 이러한 특수사건 혹은 특수범죄와 맞서며 산다….

본작의 주된 흐름은 이런 류의 작품에서 흔히 나오는 문명의 충돌과 융화인데, 이는 수사관들과 범죄자들의 마찰 그리고 손발 안 맞는 짝패들을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서로를 드리니(야만인)라는 둥 외계인이라는 둥 인종차별용어를 바지런히도 날려대며 편견을 드러내는 게 영 떨떠름하더군요.

융화나 적응이야 이상주의자들의 개소리지. 세마니 인은 3세계 난민은커녕 ‘제 4세계’에서 온 데다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 인종들이야. 게다가 지구인들이 과거에나 지녔던 생명력이 넘쳐흐르지. 그들의 폭력성도 같은 맥락이고. 아직은 괜찮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들에게 스리슬쩍 지구사회를 잠식당할 걸.

늘 그랬다. 스스로가 우위에 서있다고 믿는 부류들은 차별을 일삼으면서도 ‘이러다 뒤집히는 거 아냐’라는 식의 불안을 품고 사는 법이다.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런 반응에 불과했다.

차별과 모멸의 근원은 공포나 열등감으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죠. 본작에서 지구인들이 예기치 못한 이방인들에게 품은 선입견이 찝찝한데, 아주 틀린 소리도 아니거든요. 거 왜 영국이 인도의 영토를 점령했지만, 영국은 인도에게 정신을 정복당했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다른 문명을 야만인 취급하는 기저엔 그런 식의 역관광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있는 법입니다. 근데 세마니 친구들도 제 세상에 나타난 지구인보고 야만인이라 칭하는 걸 보면 비슷한 심상을 품은 것 같더군요.

기실 이는 ‘풀 메탈 패닉’에서부터 이어져온 주제 중 하나인데, 본작의 주역들은 속한 세계 그 자체가 틀린 데다 세대차도 겹치는 바람에 괴리가 더욱 심하죠. 그리고 가토 선생은 이를 전형적인 형사 버디물의 플롯으로 풀어갑니다.

뜻밖인데. 나름대로 인명을 존중하나 봐.

당연하지. 작업장에서 독을 풀거나 막 생명을 얻은 아기를 죽여도 그냥 넘어가는 너희 드리니완 다르거든.

공해랑 낙태말야? 그것도 좀 복잡한 사안인데…. 뭐, 정치적인 화제는 이만 접자.

정치는 무슨. 도덕이지.

아무렴이나.

1권은 두 주인공의 여정이 시작되는 파일럿 필름인 만큼 ‘블랙 레인’, ‘러시아워’, ‘서울’같은 국제수사버디물의 구조를 취합니다. 별 것 아닌, 일상적인 업무에 불과한 줄 알았던 수사를 진행하다 파트너가 죽고 다른 동네에서 마뜩찮은 신참이 글러와 그의 자리를 대신하는데, 세대와 성장배경의 괴리때문에 티격대면서도 서로를 인정해가다가 자신들이 맡은 사건이 단순한 지역범죄가 아니라 세계구급 음모란 걸 알게 됩니다. 기존체계와 관례 때문에 수사가 지지부진하다는 선입견을 품게 된 신참이 사고를 치고 막 나간 덕에 일이 꼬이지만, 뜻밖에도 궤도에서 일탈한 덕에 사건의 본질에 한결 일찍 다가서고요. 되게 상투적이죠? 그리고 각자 자신의 뒤틀린 거울 혹은 미래라 할 존재들과 맞서면서 많은 걸 깨닫죠.

난 10년 전에 레토 드리니(지구)에 왔어. 그전까진… 너랑 비슷하게 자랐지. 전형적인 무가댁 자식답게 따분하게 살았고. 그냥저냥 버티고 살았으면 언젠가 재미없는 여자와 아이 낳고 무능하기만 한 왕족과 귀족들을 위해 별 볼일 없는 땅따먹기에 나갔다 뒈졌을 걸? 그러는 게 명예로운 인생이니까. 구역질이 나더라. 내가 아무리 노력한들 아무것도 변하질 않거든. 근데 여긴 달라. 아메리칸 드림이 있더군. 최선을 다하면 그만큼 오가는 게 있더구만. 뉴턴역학,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복잡계, 최신 정신물리학, 신성기하학같은 과학들은 정말 죽이더라. 차근차근 배우니 우리 미르디(주술)랑 은근히 통하는 구석이 있지 뭐야. 록은 어떻고, 그게 음악이라네! 난 너바나 팬이걸랑. 자동차, 옷, 여자, 비디오게임. 평생동안 다 즐길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야. 하지만 그걸 즐기려면 돈이 필요해. 얼어죽을 드리니들은 존심도 없어서 돈이 장땡이거든.

개인적으로 참 마음에 들었던 전직 기사이자 현직 범죄자인 엘바디가 티라나와 대치하면서 한 말인데요, 용서받지 못할 범죄자이되 처지가 닮은 구석이 있는데다 황당할 정도로 자유로운 그의 사고방식이 티라나한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죠. 케이도 비슷한 난국을 극복하면서 한발 나아가고요. 그리하여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자리가 확정되면서 고전적인 형사버디물로 전환됩니다.

네 무례한 대접이나 장난질이야 감수할 수 있어.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잉글리시야 나도 아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납득이 안가. 너희들 볼리스(세마니인은 P자를 발음 못합니다.)는 정의의 집행자 아니었어? 군대와 달리 모든 백성을 돕고 악행을 처단하는 자들이라고 들었어. 그런데 도둑놈이랑 거래를 해? 그들의 악행을 보고도 못 본 척하면서? 말도 안 돼. 너희 볼리스들은 긍지도 없나?

지금까지 그랬듯 코웃음을 칠 수 없었다. 티라나의 말이 옳다. 경찰이란 원래 그래야 한다.

여러 가지로 상황이 복잡해서 말이지. 모든 백성을 돕고 악행을 처단한다…. 그러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던 시절도 있기야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참 복잡하게 굴러가거든.

난 이해가 안가.

우리도 마찬가지야.

햇병아리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실망하면서 제 역량의 한계를 통감합니다. 적당히 닳아빠졌고 적당히 유능했던 고참은 옛날의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는 신참을 보며 스스로에 대해 돌이켜보고요. 총기 넘치고 순수하게 원칙을 중시하는 신참과 때가 담뿍 탔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고참이 같이 뒹굴고 치받기도 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들어가며, 서로 애송이 혹은 속물로만 인식하던 편견을 들어내고 상대방의 업무방식과 수사개념을 인정합니다.

10년 쯤 전에 휴가 때 만나기로 했던 여동생이 샌테레사시에서 죽었어. 건강한 아이였다는데, 널 보면서 그 아일 투영하는 게 아닐까?

티라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오라버니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이윽고 요 듀엣은 1차집단에서 2차집단으로 모양새를 바꿉니다. 처음엔 직업적 관계에서 수용했지만, 갈수록 서로를 인생의 선후배이자 가족으로써 받아들이죠. 장장 두 권에 걸쳐 묘사된 변화양상은 삽화와 표지에도 반영돼 있는데요, 1권 표지는 인물들을 날이 서게 그린 데 반해 2권 표지는 한층 살갑고 깜찍한 느낌이 들더군요.

…이러쿵 저러쿵 했지만, 제목이 모든 걸 말해주는 모범적인 작품이죠. 풋내기 기사가 속된 말로 ‘짭새질’의 정수를 배우고, 이를 가르쳐주던 머스마는 경찰 본연의 자세에 대해 돌아봅니까요.

 

 

 ETC…

 

부제. 가짜 후기에 적힌 에피소드 제목들이 죄다 영화 패러디인데, 유독 2권 두 번째 에피소드만 ‘니드 포 스피드’라는 게임에서 따온 게 눈에 띄더군요. 그럴 만도 했죠. 흐흐.

악역들. 이 머저리들은 제 사연 구질구질하게 늘어놓으면 사망확정이란 진리를 왜 모르는 걸까요?

P226. 케이의 주무장이라 할 권총입니다.

마토바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들고 있던 권총을 찰칵 울렸다. 격철을 내리는 소리였다. 티라나가 검을 들이댄 순간 마토바도 그녀의 턱을 겨눴던 것이다. 격철소리를 듣고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그녀 또한 약간 놀란 듯했다.

가토 선생은 ‘풀 메탈 패닉’의 주인공 소스케한테 글록을 쥐어주는 바람에 요런 식으로 영화처럼 해머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분위기를 잡지 못한다고 한탄했죠. 기어이 한풀이를 한 셈입니다.


쾡이. 전작에서 소스케가 키우던 고양이(…케헴)는 흰둥이였는데, 본작에서 케이가 키우는 괭이는 쿠로이(깜씨)네요. …소스케랑 케이는 뜻밖에도 죽이 잘 맞을 것 같습니다.

 

 

'풀 메탈 패닉'에 비해 좀 직역의 빈도가 세서 처음 읽을 때 적응하기 영 쉽지 않더군요. 불만이 있다는 게 아니라, 얼마 전에 이쪽 일을 해봤기 때문인지 자꾸만 번역방식과 오타에 눈이 가더라고요.

좌우간 구식 하드보일드와 수사극, 판타지장르, 미드를 사랑하시는 분들께 적극 추천하고픈 작품입니다. 전작에 비해 변모하거나 나아간 구석도 많고요. 다만 ‘풀 메탈 패닉’보다도 호오가 확실히 갈리는 작품인 건 확실합니다. 그래도 티라나가 워낙 귀여워서 편견(?)의 벽을 허물 거라고 믿습니다만.

 

그럼...


덧글

  • MontoLion 2011/03/28 12:07 # 답글

    저도 정말이지 쏙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2권의 자동차 및 포르노 에피소드는 정말이지 깔깔거리면서 읽었을 정도니....

    그리고 후기도 자꾸 보다보니깐 세뇌 되나봅니다. 티라나의 배우는 숨ㄷ....
  • zemonan 2011/03/28 22:16 #

    역시 이분은 개그를 써야 합니다. 후기도 나름 진국이죠. 히히...
  • 미니 2011/03/28 12:52 # 답글

    본타군은 훌륭한 테러진압장비입니다!
    높으신 분들은 그런 걸 몰라요.
  • zemonan 2011/03/28 22:17 #

    고정관념이 훌륭한 신형병기의 채용을 막는 케이스라 할 수 있죠. 군대란 데가 원래 보수적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동네라서요.
  • 앨럿 2011/03/28 13:45 # 답글

    티라나 귀엽습니다, 귀여워요.
  • zemonan 2011/03/28 22:18 #

    본작의 비밀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벨제브브 2011/03/28 14:55 # 답글

    티라나는 귀엽죠 저도 좋아해요. 가토 쇼우지라면 갑자기 완전 개그 에피소드 하나 넣을 법 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 zemonan 2011/03/28 22:19 #

    2권 후반도 완벽한 개그 에피소드던데요. 다만 주인공들이 둘 다 직장인이라서 마냥 쇼만 하기가 좀 어색한 구석이 있죠.
  • Nine One 2011/03/28 15:39 # 답글

    이 작가는 아무리 보아도 이세계라는 것을 너무 동경하는 것 같습니다. 풀 메탈 페닉도 그렇고요.

    그런데... 만약 캅 크래프트에 본타군이 나온다면 어떨까요? 좋을까요?
  • zemonan 2011/03/28 22:22 #

    로망이죠. 자신이 꿈꾸던 바를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하다보니, AS니 위스퍼드니 미라쥬게이트가 나온 거겠죠.
    척 봐도 AS돌아다니던 그 동네랑은 세계관이 다른 듯하더군요. AS가 있었으면 세마니에 다국적군이 쳐들어갔을 때 언급됐을 법도 한데... 관련 범죄조차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도 본타군이 나오면 참 좋겠습니다. 일종의 서비스형식으로라도요.
  • 00 2011/03/28 16:50 # 삭제 답글

    이전표지 나올 때 '어라? 뭔가 좀 진지하게 떠든다?' 싶었더니 글쓴이가 제모난.
  • zemonan 2011/03/28 22:22 #

    많이 놀라셨나 봅니다...
  • 네리아리 2011/03/28 17:39 # 답글

    뭐지 이 한번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HIGH하게 드는 이 포스팅은!!!(두둥!)
  • zemonan 2011/03/28 22:23 #

    가토 선생, 수사극, 미드 팬들은 재밌게 보실 작품입니다.
  • PFN 2011/03/28 20:02 # 답글

    뭔가 글을 읽다가 아무리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도 글이 안끝나길래 뭔가 함정에 걸린 기분이었는데 주소창 보고 수긍했습니다.

    역시 Zeroman님은 내공이 무시무시하시군요
  • zemonan 2011/03/28 22:24 #

    또 오버했네요. 좋아하는 장르의 작품이다보니...
  • 시그마 2011/03/28 20:19 # 답글

    풀메탈 패닉 소스케 성우였던 세키 토모카즈씨 럭키스타에서 아니메 점장님도 했었지요.
  • zemonan 2011/03/28 22:25 #

    어, 그러고 보니... 세키 선생은 점장이 소스케 카드를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을려나요? 그러고 보니 아니메 점장 씨리즈랑 동방씨리즈를 크로스오버한다더니 어찌 됐을라나요?
  • fkdlrjs 2011/03/29 16:12 # 삭제 답글

    ....왜 하필 마지막 사진이 호반장님이죠? 뭐 하드보일드하긴 하지만
  • zemonan 2011/03/30 19:48 #

    그야말로 21세기에 부활한 쌍팔년대식 터프캅 아닙니까? 더욱이 명색이 과학수사물인 작품에 나와서 막 나가곤 하니 한층 인상적이라서요.
  • dante 2011/03/30 13:43 # 삭제 답글

    문명 충돌을 잘 나타내는 세계관인데 단점이라면 위에 나온대로 오마쥬랄까 클리셰가 많아서 스토리가 단순해지는 경향이 좀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아직 여러 캐릭터가 자리를 못 잡아서일지도 모르지만요.
  • dante 2011/03/30 13:51 # 삭제

    아 번역 탓도 좀 있을지도...그리고 티라나는 귀엽긴 한데 확실히 어린애라는 느낌으로 진행중이네요. 그래도 라스트 액션 히어로 같은 어린애 동료 느낌은 아니지만...
  • dante 2011/03/30 13:54 # 삭제

    덤으로 차에 대한 사랑은 제가 차가 없는데도 가슴이 떨려올 정도였습니다. 히로인보다 멋진 차가 낫다 싶을 정도로...
  • zemonan 2011/03/30 19:55 #

    전작에서도 그런 경향이 엿보이곤 했죠.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런 공식을 타파하곤 했으니 좀 더 두고보렵니다. 다만 작품의 세계관 자체가 그런 공식에 기대야만 힘을 발휘하는 동네라서 원... 그래서 2권 후반에서 대차게 뒤집어지는 양상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티라나는 사가라와 비슷한 인물이죠. 나름대로 특기분야의 잔문가답게 행동하지만, 제 세상에서도 지구에서도 다양한 경험을 못해서 좌충우돌하며 변해가는 군상이거든요. 그래서 마토바한테 더욱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거고요. 미국이야 말할 것도 없고 차 없으면 이래저래 불편한 동네와 직장에서 지내는 부류들은 차에 환장할 수밖에 없죠. 배경인 샌테레사시도 차 없으면 많이 불편한 동네라는 점이 작중에 드러나기도 히고요.
  • 7N 2011/03/31 20:06 # 삭제 답글

    우와아.....라노베에서 과학 찬양하는 얘기를 듣다니.

    왠지 사고싶어지는군요(이과생)
  • zemonan 2011/04/01 23:36 #

    '풀 메탈 패닉'처럼 본작에서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자주 강조하더군요. 다른 문명과 충돌하는 상황이기에 한층 냉정하고 합리적인 관점을 지향해야 한다는 거죠. 다만 본작에서 저 말을 한 게 범죄자다보니 씁쓸합니다. 주어잔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제뜻대로 살고자 하는 게 마음에 들긴 합니다만.
  • BloodLust 2011/04/22 10:40 # 답글

    아 글 잘 읽었습니다.
    전 캅크래프트를 좀 뒤늦게 사서 1권은 지난달에 사고 2권은 엊그제 사서 어제 다 읽었네요.
    정말 가토 쇼우지 선생은 천재라는 소리 밖에 안나왔습니다.
    게다가 분위기는 왠지 제가 좋아하는 미드 NCIS 를 보는 것 같네요.
    진지할 때는 진지하고, 개그할 때는 개그 작렬..
    뭐 다른 수사물들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다만 일본에서 1월에 3권이 나왔고, 대원은 언제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자기 페이스대로 내놓으니..
    3권이 제 손에 쥐일 날은 그저 요원하기만 할 뿐입니다.

    게다가 권당 Term이 7개월 정도인 모양이니..

    어후.. 어떻게 기다리지...
  • zemonan 2011/04/29 11:59 #

    의도적으로 미드의 코드를 많이 응용했죠. 3권이 제발 빨리 나오길 빌 따름입니다.
  • 제목없음 2011/12/06 23:49 # 답글

    3권이 정발까지 되었습니다. 재밌게 보셨으면 좋겠네요:) 전 시험준비 때문에...

    3권의 스토리는 오마주 이전의 원작의 설정대로라면 나오기 힘들었겠죠. 그거 하나때문이라도 설정을 바꾼게 나름 괜찮긴 했습니다.
    원작대로라면 과연 어떤 이야기가 됬으려나 싶기도 하네요(티라나가 여교사로 들어갔겠지만)
  • Granduke 2018/03/23 18:42 # 삭제 답글

    정말 재밌게 본 소설인데 후속권이 정발이 안 되서 슬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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