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난(Canaan) - 가나안


전반부를 채운 카난과 알파르드의 대결은 악연이 처음 시작됐던 6년 전 사건과 저번 편에서 벌어진 사투를 연상시키는 장면들로 구성돼있으며, 당시의 장면연출들을 의도적으로 뒤집어 엇나간 데자뷰를 선사합니다. 이는 12화까지 이어진 두 카난의 악연이 일단락되는 동시에 그네들이 유지해오던 역학관계가 철저하게 뒤집히고 있기 때문이죠.




마지막 사투는 양상과 순서조차 6년 전과 정반대더군요. 카난이 유인당해 샴과 떨어졌다 마지막엔 그의 최후를 목도했던 상황은 저번 편에서 마리아를 샴의 위치에 대입시킨 채 재현됐습니다만, 본편에선 샴의 최후를 연상시키는 카난과 알파르드의 대치로 시작해 열차지붕에서 끝을 봅니다. 6년전 카난과 알파르드가 함께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알파르드는 열차지붕위에서 처음으로 본색을 드러내며 싸움을 시작했는데 지금과는 순서가 거꾸로였죠.

도입부에서 알파르드가 카난에게 총을 겨눈 순간은 샴의 임종을 연상시키며, 알파르드의 사격을 카난이 가볍게 피하는 장면은 저번 편에서 알파르드가 카난을 농락하던 장면과 흡사하죠. 그리고 알파르드가 헬기의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다 실패하는 장면도 과거의 그 장면을 뒤집은 연출이었고요.

그러고 보면 저번 편에서 총을 떨어뜨린 카난이 대검을 뽑았는데, 권총에 두들겨 맞던 알파르드도 칼로 반격하더군요. 같은 맥락에서 카난이 알파르드의 암부를 까밝히는 순간도 12화에서 알파르드의 행동에 대한 반추에 가까웠죠.

회상이 종료되면서 현실로 복귀할 때, 샴의 말이 끝난 순간 화면이 노란 섬광으로 물드는데 그 순간 알파르드가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일까요? 현실 속에선 열차가 터널을 벗어난 순간, 햇살이 강해져 카난이 당황했고 알파르드는 이틈을 놓치지 않았죠.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한 두 처자의 팔이 좀 기괴하다 싶을 정도로 과장됐는데... 두 사람의 대치가 극에 달한 걸 받쳐주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프닝의 복선들이 하나둘 실체를 드러냅니다. 마리아가 갇혀있던 화물칸이 폭발한 순간, 카난이 본 마리아의 소멸은 오프닝에 나온 장면입니다. 그 직후 심장고동소리와 함께 마리아의 색깔이 순간적으로 화면을 채웠다가 사라지는데, 이는 마리아가 아직 살아있다는 복선이었으며, 카난이 부활하는 계기로 이어지죠.

그 직후 본편의 제목이 나오는데, 신기한 느낌이 들더군요. 이제껏 본작에서 각 에피소드의 부제는 본편이 끝난 후에 나왔는데 이번에 반대로 배치됐으니까요.

헬기에서 지원사격하던 아저씨는 그동안 꾸준히 나왔던 덩친데, 결국 오프닝대로 카난에게 죽더군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목소리를 내면서 말입니다...오프닝에서 카난의 사격으로 헬기가 폭발해 알파르드가 뛰어내려야 했던 것처럼 본편에서 알파르드는 본의 아니게 구르고 말죠.

아이캣치의 문자와 문신의 배치는 오프닝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데, 제목도 그랬지만 이쪽도 만만찮게 야릇합니다. 보통 아이캣치는 에피소드 중간에 나오는데, 시작한지 8분 좀 넘기자마자 나오더라고요.

오프닝에서 카난이 쥔 권총을 비추며 시작하는 이유가 드디어 나오죠. 사투의 막바지에 권총이 교환되는 장면은 감독의 전작인 ‘스트레인저 무황인담’에서도 나온 연출이었습니다. 두 짝패들의 운명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과 입장의 역전을 함축한 장면이라 할 수 있죠. 그토록 알파르드를 쏘려고 했던 권총이 스스로의 의지를 지닌 것마냥 그녀에게 흘러간 후, 목표물 자신의 손으로 목적을 완수시켜 준 순간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했습니다.

카난과 마리아가 서서히 멀어지는 이별장면을 보고 있자니 저번 편에서 마리아가 윤윤을 통해 열차를 끊어 멀어지던 순간이 생각나더군요. 미노는 열차사건을 듣고 급하게 주변을 찾아보다 윤윤과 마주친 듯싶은데, 마리아를 끌어안은 윤윤과 미노가 재회하는 장면은 핫코가 자신이 죽인 아이를 안은 채 산타나와 조우한 장면을 연상시켰습니다. 그때도 라이트 때문에 밤길이 녹색으로 물들었죠. 미노가 몰던 차의 주인이 산타나란 걸 생각하니 씁쓸하더군요.

카난이 다리를 걷는 장면은 2화에서 카난이 피곤한 표정으로 밤거리를 걷는 장면과 흡사한데, 당시엔 마리아가 카난을 걱정하는 나레이션이 흘렀으나 이번에 카난이 마리아를 생각하며 새벽거리를 거닐죠.

미노는 축제현장, 상가, 국제회의장, 2화의 식당 등등 이제껏 다녀본 곳을 되짚는데, 이 도시는 여느 때처럼 보기 싫은 걸 착착 덮어가고 있었죠. 사내는 핫코를 떠올리며 공원벤치를 찾는데 이전에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때처럼 분수가 솟더군요. 뭐 함께 앉았던 여인네는 세상을 떴지만요. 미노도 나름 처절합니다. 새삼 천박하게 구는 건 자기 페이스를 되찾으며 묵힌 감정들을 싸그리 정리하고 싶었던 거죠.


이번에도 운전수 양반이 황당한 타이밍에 나타나는데, 미노도 마리아도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놈의 동네에 완전히 적응한 거죠.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요.

윤윤은 2화에서처럼 수박갖고 또 알바 중에 장난질 치다 경을 맞더군요. 스님이 된 커밍즈는 사바시절의 미련을 돌이켜보는데, 량치에게 맞아서 깨진 안경을 아직도 쓰고 있더라고요. 싹이 돋은 노란 꽁알(?)을 보며 기쁘게 맞았던 노랑 BB탄을 떠올리는데, BB탄중에도 자연친화적인 물건이 있다더군요. 혹시 저게 그거 아닐까요?


이윽고 본작의 뿌리인 ‘428’의 배경이라 할 시부야가 비춰지는데요, 맨 처음에 비춰진 거리 정경은 2화에서 편집장이 보던 곳이며, 그때는 두 마리 새가 날고 있었죠...

시부야를 지나다니는 인물들 중에 428에 나온 분들이 있더군요. 거리 구석에 있던 머스마랑 마리아와 똑같은 더듬이머리 아가씨도 그렇고요. 저 처자는 마리아의 쌍둥이 동생입니다. ...근데 마리아의 머리는 염색한 거였나 보죠? 그리고 전시회장 앞에 있던 택시운전사는 게임에서 홍콩의 운전수 선생과 비슷한 역할을 맡은 양반입니다. 미노와 함께 있던 사람들과 마리아 주변에 어정거리는 양반들도 죄다 게임의 등장인물들인데, 잘 보니 아버지도 와 있더군요. 미노의 차림새는 2화의 회상에 나올 때랑 똑같은데, 이 또한 게임과 같은 차림새죠.



 개안. 그리고 결전



 사물을 항상 냉정하게 파악하던 알파르드는 본편에선 초반부터 판단미스를 범합니다. 이 순간부터 알파르드의 패배는 예고된 거나 다름없었죠. 그 반면 알파르드와 대치할 때마다 항상 심리상의 문제로 공감각을 켰다 껐다 했던 카난의 눈동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올곧게 빛을 유지하며, 정말로 필요한 순간에만 공감각을 이용합니다. 

알파르드는 처음으로 공포의 색깔-녹색을 내비칩니다. 자신이 모든 걸 파악했다고 생각했던 소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예측에서 벗어난 동시에 역으로 자신을 똑바로 ‘직시’한 순간 공포가 엄습했던 거죠. 샴의 예측대로 공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며 싸웠던 알파르드의 강점이자 약점이 단적으로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피가 흐르던 팔을 움켜쥐자, 핏줄기가 손을 타고 내리는 걸 보면서 그녀의 분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어 섬뜩하더군요. 너무도 오래간만에 느낀 좌절감은 한편으로 그녀의 전투감각을 어느 정도 복구시킵니다. 스스로의 효율을 극대화시키고, 적은 비효율적으로 만들어 싸우던 여인은 지금은 자신이야말로 한없이 비효율적인 상태란 걸 확인했기에 물러나고자 하죠. 그리고 또다시 길동무가 되자고 하는데, 같이 죽자거나 하는 흰소리가 아닙니다. 6년 전 그때 싸움을 매듭짓지 못하고 수년간 지루하게 드잡이질을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 또다시 투닥이며 살자는 거였죠. 알파르드에게 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카난도 자신도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상처를 입은 채 끝난다는 거였는데... 이는 그녀가 재차 범한 판단착오였죠. 카난은 이순간에도 마리아가 살아있을 거란 희망을 믿음으로 승화시킨 채 견지하고 있었으니까요.


알파르드는 죽었을 거라 추측되는 마리아를 찾지 않고 자신을 쫓아온 걸 비꼬는데, 자신처럼 잃어버린 보물이 아니라 증오하는 적에게 집착하는 존재가 됐다고 믿고 싶었던 거죠.

카난이 자신과 마리아에 대해 설명할 때, 카난은 알파르드를 똑바로 보나, 알파르드는 눈을 피합니다. 이때 알파르드가 마리아와 카난의 관계에 대해 잘못 짚으면서 본작의 테마가 재차 강조되죠. 막판에 와서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한 건 결국 알파르드였으니까요.

카난은 마리아가 샴과 같은 빛이 아니라 친구라 선언하며, 이는 마리아가 언급했던 관계와 상통하는 발언인 동시에 두 사람이 진실로 통했다는 걸 확인시켜주죠. 친구가 더 이상 샴을 대체하거나, 자신의 도피심리를 위한 매개체가 아닌 진실한 ‘가나안’이 됐다는 말은 그녀의 성장을 확연하게 가르쳐줍니다.

달아나려는 알파르드를 막아선 순간, 카난의 눈이 재차 충혈되며, 그녀가 ‘내가..’라고 말한 순간, 알파르드가 신경질적으로 이 말을 따라하며 반문하는데, 극도로 내몰린 심경이 도출된 거죠. 그러나 알파르드가 반문한 순간의 뉘앙스와 달리 카난은 그녀에게 더 이상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사다리를 타고 비상했던 알파르드는 처음으로 사다리에서 추락합니다. 원하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선 밑바닥에서부터 추하게 매달려 기어올라야만 했던 뱀이 처음으로 굴러떨어진 순간이었죠.

알파르드가 헬기에서 떨어져 카난을 덮친 순간, 두 사람의 관계역전이 재차 강조되는데, 그전까지 알파르드는 열차 좌측에, 카난은 우측에 있었는데 이 순간을 기점으로 정반대되는 위치에 놓이거든요.

새하얀 어둠이라. 이 때 카난은 공감각을 끈 상태였고, 그저 자신의 느낌만으로 알파르드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알파르드가 흔들리고 있음을 비추는 또 다른 장면이 바로 어이없게 실족한 순간이었습니다. 이전 같았으면 결코 저지르지 않을 실수였는데 말이죠...

알파르드의 칼부림에 카난이 문신을 가려놓은 천이 찢긴 순간부터 시작된 마지막 대치 장면은 그야말로 두 처자의 관계와 운명을 극한까지 함축한 순간이었죠. 두 카난이 스승을 향한 마음에서 새겼던 동시에 그네들의 인연을 상징하던 문신이 알파르드에 의해 드러나고, 각자의 문신이 새겨진 팔로 마주잡은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두 사람의 악연을 제대로 받쳐줍니다. 

스승이 전수한 가르침을 극한까지 실현하기 위해, 작전을 완수하기 위해, 공유하던 철학을 저버린 사내의 배신을 단죄하기 위해, 자신이 아닌 ‘초인’을 선택한 앙갚음을 하고 싶었기에... 알파르드가 샴을 죽인 이유는 복잡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단순하면서도 명백했죠. 샴을 죽인 순간, 마음 한편으로 해방되리라 믿었던 알파르드는 끝내 산송장이 돼서 한층 스승에게 사로잡혔으니까요.

결정권은 산 자에게 있다고 말한 건 끝내 구해주지 못한 핫코였죠. 카난이 스스로에 대해 한 말-수많은 사람을 만나 변했다-을 반증하는 순간이기도 했으나, 눈앞의 사형이 핫코처럼 스스로의 업보가 시작된 지점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채 침잠하려는 존재였기에 외친 절규였습니다. 또한 카난이 알파르드를 죽이지 않고 구원하려 했던 건 스승이 말한 바-증오엔 의무로만 답해야 한다-를 지키고 한 바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알파르드야말로 카난이 됐을지도 모를 부정적인 페르소나였기 때문입니다. 같은 뿌리로부터 난 동시에 누구보다도 자신과 닮은 짝패였고, 또한 하나뿐인 ‘가족’이란 점을 마주잡은 팔의 문신이 증명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기에 두 사람의 팔로부터 줌 아웃되며 전체적인 장면을 비춘 직후 나온 아이캣치에서 카난이란 글자를 가로지르듯 뱀문신이 배치된 겁니다. 이때 카난이란 문자의 색은 샴의 색깔인 담갈색 혹은 마리아의 색깔인 노랑처럼 보이죠.

알파르드도 끝내 인정하고 맙니다. 스승을 죽였던 열차로부터 한발도 벗어나지 못한 건 카난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란 걸요. 자신의 실상에 대해 짚어보고, 카난의 속내에 대해 깨달으면서 차례대로 카난과 샴, 알파르드의 문신이 강조되는 게 인상적이더군요. 순서가 반대됐기에 외려 역설적으로 강렬하게 부각됐거든요.

뱀의 주박이라... 알파르드는 스스로가 선택한 이름대로, 스승이 부여한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왔죠.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야 그녀는 ‘뱀’을 숙명이 아닌 저주라 외칩니다. 카난이 그랬듯 그녀 또한 해방되길 원했지만 그러지 못한 게 얼마나 한스러웠는지 드러나는 대목이었죠. 그토록 알파르드를 쏘려했던 권총이 얄궂게도 카난이 살심을 포기한 마지막 순간에 알파르드에게 넘어갑니다. 알파르드는 마음만 먹으면 카난을 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야 카난과 비슷한 깨달음에 도달했죠. 카난을 죽여 봐야 자신은 스스로가 건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세상 무엇보다도 배제하고 싶었던 것은 추하게 뒤틀린 자신이었다는 걸요. 그러나 카난의 마지막 제안을 받아들일 순 없었습니다. 그러기엔 너무도 멀리 왔으니까요.

그리하여 카난이라 자칭했던 여인은 짝패가 아닌 자신의 팔을 쏩니다. 카난의 제안에 대한 극단적인 거절을 표명한 행위기도 했으나, 눈앞의 사매와 똑같은 문신이 새겨진 이 팔이야말로 그녀의 집착과 한계를 함축하고 있었으니까요.

정말 끔찍한 장면이라, 말이 안 나올 정도였죠. 항상 하늘을 향해 비상하곤 했던 알파르드는 처음으로 나락까지 추락합니다. 그녀의 추락은 정말 덧없을 정도로 처량했는데, 핏방울이 그녀의 뒤를 따르듯 떨어져서 더욱 그랬던 듯싶습니다.

알파르드가 방아쇠를 당긴 순간부터 총성을 제외한 일체의 소리가 사라졌다가 재차 터널에 가까워지면서 외부음향이 되살아납니다. 열차가 어두운 터널로 재진입 했듯이, 카난도 알파르드도 6년 전 그 열차에서 또다시 하차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리하여 카난은 사형이 남긴 왼팔을 놓으려다 재차 힘을 줘서 고쳐 잡습니다. 자신 또한 이리 됐을지도 몰랐기에, 그리고 알파르드가 핫코나 그간 떠난 인물들처럼 끝내 다른 선택을 취하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으니까요.

제자를 한 번도 알파르드라고 부른 적이 없던 스승이 어째서 그녀의 회상속에선 그리 호명했던 건지 밝혀집니다. 또한 그녀가 여태껏 임의로 살짝살짝 왜곡하곤 했던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이 처음으로 온전하게 밝혀지죠. 알파르드가 사감에 따라 싸우게 되면 그녀의 이름이 지닌 다른 의미를 실감하게 된다는 유언이 여러모로 의미심장했습니다. 알파르드는 뱀자리의 별을 뜻하는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인간을 뜻하는 말이죠. 샴을 떠난 후 ‘뱀’으로써 살아가던 알파르드가 길을 엇나간 순간 더할 나위 없는 패배감으로 얼룩진 고독을 절감한 현재순간을 정확히 예측한 유언이었던 겁니다.

샴은 그녀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죠. 초인이 아닌 극인으로써 살아온 여인은 그야말로 기계처럼 냉정하게 만사를 관조하며 파악하기에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프로군인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온전하게 사적인 정념 때문에 싸운 것은 결국 스스로가 쌓아올린 실력의 근원마저 부정한 짓이었으며, 그렇기에 자신의 짝패라 할 카난을 미처 이해 못한 채 추하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죠.

알파르드는 이제껏 정말 한없이 냉철했습니다. 가끔씩 카난과 조우했을 때, 진심을 내비치긴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우연히 마주친 짝패에게 최소한의 예우만 차린 부수적인 사행에 불과했죠. 샴을 죽였던 작전에서도 그녀는 임무에 기반한 목적달성을 우선시한 후 스승을 죽이는 식으로 처리사항의 순서를 철저하게 지켰을 정도니까요. 국제테러회의에서조차 작전에 포함되지 않는 고로 카난을 말살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랬던 그녀가 이번에 카난에게 건 싸움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00% 사적인 정념에 근거한 전투였습니다. 팩토리와 플라워가든을 파괴한 후, 이제껏 계획한 바를 완수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사감에 따라, 카난과 싸우기 위해서만 무대를 준비하고 일을 쳤던 겁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처음으로 거스른 결과는 혹독할 수밖에 없었죠.

샴의 예언이 들어맞았다는 걸 깨달은 순간, 알파르드의 절망감은 극도에 달했습니다. 결국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승이 예측한 바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의 망령에 사로잡힌 채 살수밖에 없다는 좌절에 직면해야 했으니까요. 또한 카난의 마지막 말도 알파르드의 극단적인 행동을 부추겼습니다. 카난은 공포를 알기에 증오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샴의 말마저 적중한 순간 알파르드의 좌절감은 그야말로 한계선을 넘어갑니다.

알파르드 자신도, 눈앞의 짝패도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스승의 그늘을 극복하지 못했던 겁니다...


 Bye Bye Blackbird



 12화의 후반부터 나온 두 마리 새는 본편에서 두 처자의 관계를 표상합니다. 카난이 마리아는 죽지 않았다고 선언하자 두 마리의 새가 카난의 상공을 스쳐지나간 후 하늘을 맴도는데, 이때 본작에서 처음으로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죠. 카난과 마리아를 가리키던 이 새들이 존재감을 주장한 것은 카난의 믿음대로 마리아는 살아있다는 뜻의 연출이었죠. 그리고 새들이 두 번째로 우는 순간, 하늘을 올려본 마리아는 나란히 날던 새중 한 마리가 짝에게 다가갔다 멀어지는 걸 봅니다. 마리아가 저번 편에서 알파르드의 지시를 따라 카난을 떠났던 게 도피심 때문이 아니라, 카난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대사와 맞물리는 장면인데, 이 직후 카난이 마리아의 생존을 굳건하게 믿는다고 재차 선언한 순간 새들이 카난과 알파르드의 머리위로 지나갑니다. 마리아와 카난의 거리를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불가능한 장면이지만 이는 둘의 마음이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똑바로 교차했다는 걸 강조해주죠. 또한 중반에 둘이 겪을 이별과 그 이유에 대한 복선이기도 했습니다.

본작에서 두 카난의 마지막 대면이 그들의 악연을 재현했던 것처럼 마리아와 카난도 처음 우애를 쌓기 시작한 순간으로 회귀해 이별을 준비합니다. 두 친구는 처음 만났던 순간으로 돌아왔지만, 그녀들 자신은 헝클어진 실처럼 너무도 많이 변한 후였죠. 어쩌면 이 장면은 단순한 심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마리아의 병실창문이 열려있었는데, 그녀의 정신이 몽롱할 때 카난이 남몰래 찾아와 나눈 대화였을 수도 있겠죠.

정신이 든 마리아는 창가에 홀로 앉은 새가 날아오르는 걸 봅니다. 전반부에서 새들과 달리 이번에 홀로 모습을 비춘 새는 떠나간 카난과 남겨진 마리아를 동시에 연상시키는 이별의 상징이었죠. 그러고 보면 미노도 말했지만 카난은 자신과 샴, 알파르드에 대해 상세하게 얘기한 적이 없었군요. 쯧.

이전에 카난이 땄던 쾡이 인형은 2화에서 새빨갛게 물든 적이 있었는데, 그 흔적도 이젠 희미합니다. 두 친구가 했던 실뜨기가 그랬듯이, 무릇 변하지 않는 건 없는 법이죠.

함께 길을 걸을 순 없어도 마음속으로 서로를 그리는 건 가능하다는 미노의 말이 찡하더군요. 이를 증명하듯 마리아는 미노의 말을 되새기며 창밖을 보는 순간, 그녀의 시야에 비친 다리에서 카난 또한 병실을 보고 있었죠. 카난이 마리아에게 이별을 고할 때, 밝아오는 여명을 배경으로 한 마리 새가 날아오르는데 아까 그 새가 아닐까요... 이렇게 카난도 마리아도 다시금 홀로 날아오를 때가 닥친 겁니다.

마리아는 총상으로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었는데, 상하이에 올 때는 하얀 옷을 입더니 갈 때는 붉은 옷을 입는군요. 음.

미노와 마리아가 택시에 나눈 대화에서 마리아의 변모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윤윤이 신청한 노래는 지금껏 네네가 부른 노래들과 달리 서정적이었죠. 도입부의 가사는 앞서 카난이 새벽녘에 마리아를 전송하던 순간을 연상케 하더라고요. 마리아가 갑자기 미노에게 이번 여정에 대한 감상을 쏟아낸 이유도 지금 보는 거리의 정경이 아까 카난과의 이별을 실감하며 보던 새벽거리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어서가 아닐까요? 윤윤이 신청한 노래덕에 그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에 저런 상념이 들었겠죠.

처음 왔을 때처럼 마리아는 비행기에서 상하이를 내려 보며, 카난은 친구가 탄 비행기를 올려봅니다. 1화에선 막연한 우연에 불과했던 교차행위였으나... 이번에 깊은 마음을 담아 서로를 전송하죠. 그만큼 두 사람이 많은 걸 배우고 또 컸으니까요. 1화처럼 카난은 마리아가 탄 비행기를 장난삼아 겨누며, 찜합니다. 그때는 자기보다 아래쪽에 위치한 인형을 쐈지만, 이번엔 그 인형을 간직한 채 하늘높이 날고 있는 친구를 겨누죠. 그 때처럼 나중에 가지러 가겠단 말도 안 하고요. 그저 비행기를 탄 친구가 자신에게 있어 희망의 안식처란 점만이 중요하니까요.


윤윤이 말했듯이 언젠가 또 볼 날이 올 테니 굳이 찾아가겠다고 말하지 않았던 겁니다.


언젠가 이 처자들이 또 만날 날이 오겠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관계를 재시작하거나, 실타래처럼 엉킨 관계를 고치기 위한 건 아닐 겁니다. 그렇고말고요...



 가나안


 유대인들이 출애굽 후에 도달한 가나안은 약속의 대지였지만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그들은 끊임없이 피를 흘렸고, 또다시 방랑길에 나서야 했죠. 이를 생각하니 본작의 인물들도 종당에 비슷한 결말을 맞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편의 제목대로 희망한 끝(キボウノチ)에 도착했던 희망의 땅(キボウノチ)도 등장인물들에게 새로운 여행길을 선사했으니까요. 그렇게 새로이 길을 나선 두 카난은 간직할 건 간직하면서도 변한 구석을 내비칩니다.

알파르드는 이전처럼 샴을 흉내낸 코트가 아니라 적갈색 재킷을 입고 있는데, 샴과 카난의 색이 조금씩 엿보이는 옷이더군요. 머리 스타일도 예전의 카난처럼 풀고 있고요. 그리고 카난은 이전과 달리 녹색군용재킷을 입었으며, 알파르드처럼 머리를 묶어 올렸습니다. 두 카난의 관계가 역전된 동시에 그들이 제각각 조금씩 서로를 닮아가며 새롭게 걸음을 내딛은 겁니다.

물론 변모하기만 한 게 아니라 상하이에서 챙겨온 것들도 있었죠. 구리선으로 만든 에펠탑이랑 카난이 머리를 묶은 붉은 실처럼 말입니다. 이전에 마리아가 쾡이인형에 붉은 실을 합체시켰는데, 미노가 갖다줬을 땐 없었죠, 아마? 그리고 이전과 달리 녹색군용재킷을 입고, 왼손에 붉은 천이 아니라 녹색테이핑을 한 게 눈에 띄더군요. 그녀가 후반에 접어들면서 가장 많이 맞닥뜨린 색상이 바로 녹색이었죠. 배운 바를 새겨두고자 한 마음가짐의 발로랄까요?

완결편답게 이제껏 애니 본편에서 나왔던 장면들을 연상시키는 요소가 잔뜩 나오죠. 그리고 마리아는 후반에 원작게임의 배경이자 사태의 시작지점이었던 시부야에서 전시회를 열기까지 합니다. 저번 편부터 최후의 싸움을 위해 악연이 시작된 순간으로 회귀해 반복하던 두 카난처럼, 마리아와 미노, 윤윤... 그리고 상하이란 도시와 이 작품 자체가 이제껏 밟아온 과정들을 돌이키며 시작점으로 돌아갔던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퇴행이 아니라, 지금까지 진행된 이야기 속에서 무얼 잃고 얻었으며, 어디를 다치고 얼마만큼 컸는지를 직시하고 아픔을 치유하면서 새로이 길을 나서기 위한 치유의 시간이었죠. 잠시동안 회자정리를 하며 안주하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어차피 삶은 계속되고, 죽기 전까지 엔딩따윈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사진전 또한 그래서 의미깊은 행사였습니다. 이 사진전의 제목이 나중에 드러나죠.

마리아가 마지막에 마주한 두 ‘카난’의 사진... 한쪽은 어두운 실내에서 가볍게 조소하고, 다른 쪽은 탁 트인 하늘 밑에서 무표정을 견지하죠. 모델들의 외모만큼이나 상반된 사진들이지만, 많은 감정이 담겼다는 점에선 같은 사진과 진배없었습니다.

사진전에서 본작의 제목이 카난인 이유가 새삼 드러나죠. 그녀가 많은 걸 보고 배우게끔 한 도시와 두 처자의 이름인 동시에 그녀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있어 ‘가나안’이었으니까요. 마리아가 카난이란 전시명을 사랑스럽게 쓰다듬는 게 참 알싸하더군요.

물론 세상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큰 상처를 입었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 아픔도 잊혀졌고 흉터도 희미해졌죠. 그러나 이 모든 걸 똑바로 지켜봐야 했던 당사자들은 너무도 많이 변해야만 했습니다. 미노와 마리아를 비롯한 인물들이 홍콩을 떠나며 내비친 표정엔 그런 안타까운 심경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세상이 그들 자신의 변모를 뼈아프게 실감시켰으니까요. 아직 방황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는 젊은이들에겐 그것이 성장통으로 느껴졌고, 이들과 함께 하며 지켜보던 어른들에겐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또 하나 생긴 겁니다. 

죽음은 삶을, 절망이 희망을, 욕망이 증오를, 운명이 자유를, 꿈이 현실을 정의한다.

From Sandman

희망의 땅은 본작에서 크게 두 가지로 비춰집니다. 안도감을 선사해 스스로와 세상을 볼 때 보고 싶은 것만 보게끔 해주는 안식처이자, 자신에 대해 직시하며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써 말이죠. 두 카난과 마리아를 비롯한 본작의 인물들은 서로에게 있어 그런 위치를 점하는 동시에 때때로 이를 뒤집기도 했습니다.

본작의 ‘가나안’은 희망의 땅이되 안식의 대지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희망으로 인해 쓰라린 상처마저 들추고 마주보게끔 하는 곳이었죠. 그렇기에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때로 상처로부터 삶을 버텨나갈 힘을 얻곤 합니다. 두 카난과 마리아를 비롯한 본작의 인물들, 그리고 원작 ‘428’의 인물들도 그 덕에 버거운 과거를 짊어지고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요.


본작은 엄하면서도 부드럽게 희망의 땅은 안주의 터전이 아니라고 설파합니다. 언젠가는 멈춰서거나 그 자리에서 여생을 머물게 될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전까지는 끊임없이 길을 나서고, 새로운 길동무들을 만나며 이방인들의 대지를 들러보기도 하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의지와 의존, 안식과 안주는 엄연히 다릅니다. 스스로가 갈구하던 희망의 땅에 지나치게 집착하던 자들은 이에 의존하고 또 안주하려 들었죠. 결국 정체와 퇴행으로 귀결됐고요...

본작에서 다른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참담한 결말을 맞이한 군상들-산타나, 핫코, 량치, 보너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처음으로 접한 안식처에 지나치게 집착했고 또 의존했죠.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좁히고, 자가당착과도 같은 최후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카난과 마리아도 사실 크게 다르진 않았습니다. 작품 초반에 마리아가 카난에게 기댔듯이 후반에 너무도 세상살이가 힘들어진 카난은 마리아에게 의존하려 들었거든요. 그리하여 앞서 언급한 군상들과 다를 게 없는 지경에 이를 뻔 했으며, 그렇게 되기 전에 두 사람은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며 이별해야만 했던 겁니다. 알파르드 또한 자신이 나락에 떨어뜨린 인물들과 흡사한 종말을 맞이할 뻔 했으나, 이를 간신히 모면했죠. 이 세 사람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직 자기만의 답을 찾지 못했기에 유보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추락은 뭘 뜻할까, 브루스? 떨어지면 올라오는 법을 배울 수 있단다.

From Batman Begins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련의 사태를 통해 이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변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어쩌면 그것은 희망의 땅 가나안을 갈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가 가나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12화와 13화에서 마리아와 카난이 이전처럼 막연한 바람과 달리 굳건한 믿음에 가까운 인연을 다지는데 성공했던 것처럼요. 비록 함께 길을 걷진 못하는 처지란 걸 확인했기에 서로를 마음속으로 그리며 희망하는 위치로 물러서야 했지만 말입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니만큼 세 처자가 서로에게 있어 기대고 안주하기만 하는 쉼터가 아니라 진실로 마주 보고 의지할 수 있는 가나안이 되길 희망할 권리 또한 마땅히 있겠죠... 



 잡상들...



 참 신기한 작품입니다. 극장판도 OVA도 아니면서 작화수준이 전반적으로 상당한 건 물론이고, 쓸데없이 쉬는 작화가 없어요. 1화에서 축제 중인 거리의 배경인물들이 움직이는 걸 보면서 1화니까 저럴 거라고 속단했다가 번번이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이 작품에선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그림이 쉬질 않고 꾸준히 움직여요. 제작진이 이토록 오기를 부린 이유 중 하나는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이 바로 배경인 상하이-모순으로 가득 차 있지만 죄인들에게 있어 잠시나마 안주할 수 있던 또 다른 CANAAN이니까요. 작품 전반에 걸쳐 제작진이 얼마나 정성을 쏟아 상하이를 묘사했는지 잘 알 수 있는데, 후반에 마리아가 전시회에 내건 사진들도 제작진이 현지답사를 할 때 찍은 사진이겠죠. 동시에 이런 제작방식을 통해 시종일관 마리아가 언급한 본편의 주요테마-봐야 할 것을 봐야하며, 굉장한 요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제각기 지닌 광채를 보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깨달음을 직접적으로 표상한 겁니다.

그리고 본작은 세계정황과 정치적으로 꽤 위험한 구석을 가차 없이 찌르는데요, 카난의 출신이 이라크란 점부터 시작해서 본편의 테러회의를 놓고 전개되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현실이 어째서 시궁창인지를 잘 가르줍니다. 여타 픽션-특히 TV쪽의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지명이나 기관의 명칭을 임의로 짓고 나중에 쏟아질 뒷말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죠.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방편인데, 한예로 ‘풀 메탈 패닉’의 경우 작품 초반 납치극의 배경이 원작에선 북한이었는데, 애니화되면서 국가명을 수정했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에선 그런 게 없습니다. 배경이 되는 상하이도 그렇지만, 중반을 넘어서면서 언급되는 여타 군기지나 지방의 소도시들조차 분명하게 실명이 언급되죠. 사라진 마을 자체는 픽션이지만 그 마을의 위치도 후반의 뉴스에서 어느 동네 근방이라고 확실하게 설명하고요. 이런 면모도 본작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직시의 테마를 받치기 위한 거겠죠. 

음향연출에서도 나름 독보적인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5화에서 윤윤이 떠나는 순간의 음향연출이 기억에 남습니다. 서정적인 음악과 우호적인 나레이션에 맞춰 어딘가로 가던 윤윤이 집정리를 하는 순간 량치의 가학적인 독백이 들리면서 배경음악의 톤이 자연스럽게 바뀌는 구성은 정말 감탄스러웠습니다. 그밖에도 최종화의 알파르드 자해씬과 터널진입의 교차같이 치밀한 음향구성도 적지 않았고요.
등장인물들도 하나같이 버리기 아까운 친구들이었죠. 몇 명만 둘러볼작시면...
마리아. 인질계의 진정한 거성으로 등극한 히로인이죠, 암요.

윤윤. 진짜 대단하죠. 달리는 열차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황당한데, 쑥대밭이 된 열차에서 마리아를 꺼내기까지 하니... 마리아를 향해 뛰어갈 땐 먼지까지 흩날리더군요. 카난이 마리아의 생존을 믿었던 근거 중에 하나는 바로 윤윤의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과 여러모로 흡사하면서도 또 다르게 마리아와 관계를 맺은 이 처자가 약속을 반드시 지킬 거라 신뢰했던 게 아닐런지요.
커밍즈. 어찌보면 이 친구가 제일 나은 결말을 맞이한 걸지도 모릅니다.
미노. 이 친구는 안 된다니까요.

네네. 징합니다.


...뭐, 어정쩡하고 흠잡을 데가 적잖은 작품인 건 사실입니다. 타입문의 원안 및 설정이 춘소프트와 애니제작진의 방식과 충돌하면서 적지 않은 위화감이 발생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종합적으로 평가하자면 요새 보기 드물게 앞뒤 잘 들어맞고 깔끔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엔딩만큼이나 전반적으로 군살이 적어서 보기 좋은 작품이었죠. 개인적으로 슬슬 물리기 시작한 타입문을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요사이 배트맨 씨리즈에 재차 심취중이라 마지막 싸움을 보면서 자꾸만 ‘배틀 포 카울’의 최종결전이 떠오르더군요. 브루스 웨인의 사후, 혼란의 도가니가 된 고담시를 배경으로 1대 로빈이자 나이트윙인 딕과 2대 로빈인 제이슨이 차세대 배트맨 자리를 박터지게 싸우는 작품인데요, 브루스의 뜻을 지켜나가려는 딕과 은사의 이념을 곡해해서 이어가려는 제이슨이 마지막에 열차위에서 피튀기는 개싸움을 벌였더랬죠. 인물관계 및 구도도 그렇지만 마지막에 딕이 내민 손을 내밀고 자폭하는 제이슨의 행태도 참...

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이클 만 감독의 ‘콜레트럴’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많았습니다. 두 주인공이 한 여자를 죽이느냐 지키느냐 하며 지하철에서 결전을 벌이는 거하며, 작품의 축인 권총의 주인이 바뀌는 기믹연출은 10화에서 핫코가 산타나의 총을 쓰게 되는 과정 및 최종화에서 알파르드가 카난의 권총을 집게 되는 순간과 흡사한 느낌을 주더라고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배경이 되는 도시의 구석구석을 비추며 도시 자체를 또 다른 주역으로 부각시키는 연출스타일이 제일 찐하게 아른거리네요.


아무튼 생각못한 다크호스를 선사해 즐겁게 해준 제작진과 멋진 자막을 만들어주신 분들, 그리고 두서없는 글을 읽느라 눈을 혹사하신 분들게 새삼 감사드리며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P.S. 극장판이 개봉한다네요? 총집편에 가깝다고 하는데 새로 추가될 장면은 없을라나요. 애니메이션도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원작게임이나 해보렵니다.

by zemonan | 2009/09/30 06:07 | 천기누설 겸 감상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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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gforce at 2009/09/30 06:46
감상글 잘 봤습니다. CANAAN을 보면서 제가 받은 전체적인 느낌은... 불친절함. 딱 그 정도더군요=_= 스토리텔링 일체가 말이죠.
Commented by zemonan at 2009/10/01 01:03
제작진이 방영전부터 대놓고 게임과 연계해야만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거라 말한 작품이기도 하고... 이를 제외해도 아리송한 구석이 몇 군데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단점들을 충분히 상쇄할만한 구석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데다, 꽤 즐기면서 봤거든요.
Commented at 2009/09/30 18:5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zemonan at 2009/10/01 01:06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주인장께는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Commented by 레이사랑 at 2009/10/06 19:43
신비로에서 종종 뵙곤 하는 레이사랑입니다. 영준님의 리뷰를 평소에 너무나도 재미있게 봐서 한가지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어 글을 남기게 됐습니다. 영준님 이메일 주소가 알려지게 되면 귀찮아지실 것 같아, 제 이메일을 남기니 혹시 영준님 리뷰를 다른 곳에 사용하실 생각이 있으시면 knightofrei@lionlogics.com 으로 연락주시면 고맙겠습니다.
Commented by 소리마치다카시 at 2009/10/06 20:57
링크 해갑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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