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5일
식령 제로 - 낙원의 추방자들


크게 보면 본편은 3화와 가장 유사합니다. 카구라가 자신의 ‘어머니’와 사별하고(카구라의 어머니와 요미 둘 다 숲에서 임종을 맞죠.), 몇 년이 흐른 후 빈자리를 채워줄 새로운 동반자와 업무를 시작하며 끝나니까요. 그러나 연출이 그냥 반복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과거의 상황들과 유사점 및 차이점을 분명히 드러내 바야흐로 클라이맥스를 돋보이게 하죠.
본편의 연출은 완결편답게 아오키 감독이 콘티와 연출을 직접 맡았고, 작화감독만 6명이 달라붙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그림과 장면구성에 제대로 힘이 실려 일관성을 견지하죠. 그중 한 가지가 바로 인물들의 배치와 가상선 연출이었습니다. 


요미와 카구라의 1차 대면에선 요미와 카구라의 위치와 높이가 완전히 반대인데다, 높은 곳에 위치한 요미는 좀 더 밝게, 카구라는 약간 어둡게 잡고 있죠. 그리고 화면 안쪽에 나뭇가지로 선을 그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은유합니다. 이 배치선과 음영연출은 두 사람의 얼굴을 클로즈업할 때도 이어집니다. 



그러나 요미가 단호히 말을 끊은 순간, 좌우배치는 그대로 두고 안면의 그늘상태만 역전되죠. 그리고 둘이 싸움을 시작하기 위해 각자의 영수를 소환한 순간, 카메라는 소녀들을 일시적으로 화면의 중앙에 위치시키며 난홍련은 좌측을, 백예는 우측을 향하게 됩니다. 





이런 좌우배치는 두 사람의 대립국면을 받혀주기 위한 건데, 본격적인 전투 속에서도 집요하게 이어지며, 때때로 전세가 역전되거나 감정의 충돌이 극에 달할 때 이를 뒤집어 긴장감을 한층 자극하죠.



가상선의 대립은 노리유키와 카구라의 대담에도 나옵니다. 카구라의 응급처치를 도와준 노리유키가 왼쪽으로 걸어 나가며, 카구라는 오른쪽에 앉아있는데 시퀀스의 마지막까지 구도가 유지되죠. 이는 나중에 설명드릴 노리유키의 역할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마지막 대결에선, 처음의 한순간을 제외하고 예의 가상선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됩니다. 단, 요미의 진정한 바램이 드러날 때는 요미가 우측에서 좌측으로, 카구라가 좌측에서 우측으로 이동하게끔 비춰 진실의 무게를 역으로 강조하죠... 


최후의 크로스카운터 직전 요미가 외친 말은 바로 7화의 대련에서 비슷한 상황 때 충고했던 말이었죠. 그 때는 카구라가 목을 노렸다 요미에게 배를 찔렸는데, 이번엔 정반대의 상황이 됐습니다.


요미를 찔렀던 금강저는 바로 그녀 자신이 노리유키에게 죽여 달라며 건넸던 물건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메이도 자신이 쓰던 장도에 죽었죠. 2년 후, 원령이 된 요미가 카구라에게 사자왕을 뺏기다시피 해 결정타를 맞았다는 걸 생각하면 심경이 복잡해집니다... 

요미가 마지막에 누이보고 ‘강해졌다’고 평하는데, 2화에서 했던 말과 내용은 같아도 실린 감정이 너무도 틀렸죠. 냉혹하게 증오심을 뇌까리던 언니가 같은 말에 기쁨과 회한을 실어 건넸을 때, 카구라의 표정이 안쓰러웠습니다. 
요미가 유언을 남길 때, 의도적으로 요미의 얼굴을 가려서 보는 사람의 상상에 맡기는 연출이 여러모로 심금을 울리는데... 사실 전의 에피소드들과 달리 본편에선 격전 중에 이런 연출이 종종 나오더군요. 처절무쌍하게 추락하는 전개 속에서 시청자들에게 한숨을 쉬고, 본인들의 감정을 담을 여지를 제공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음영의 역전은 마지막까지 이어집니다. 몰려드는 망자들을 향해 돌아섰던 순간, 소녀의 얼굴에선 완전히 음영이 사라지다시피 했는데... 주인의 마음을 대변하듯 백예가 튀어나온 순간, 그녀의 얼굴을 커다란 그늘이 덮어버리죠.
삶과 죽음을 짊어진 자들


특전대와 대책실의 잔존병력을 통합해 지휘하던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1화에서 화차에게 우걱우걱 씹혔던 그 양반이더군요. 용케 살아남았어요. 방탄조끼가 돈값을 했나보죠? 이전과 달리 협조적인데, 더 이상 자리 싸움할만한 건덕지고 뭐고 남지 않은 상황이긴 하죠. 

먼저 간 자들의 흔적을 짊어진 건 그들이나 카구라만이 아니었죠. 이와하타는 전에 난홍련에게 박살난 드릴 한 짝 대신 카즈키의 가방을 쓰고, 나부는 형제의 유품까지 들고 총탄을 퍼붓습니다.


막 데뷔한 13호는 불길한 넘버에 어울리게 맹활약을 선보입니다. 이전과 달리 발도한 후에도 몇 번이고 가속을 가할 수 있는 건블레이드인데, 덕분에 요미와 싸울 때 말도 안 되는 궤도 변경을 행하기까지 하죠. 하지만 13이란 숫자에 걸맞게 지기도 일찍 집니다. 제 아무리 장인의 정성이 들어간 물건이라도 원체 도신에 무리가 가는 구조였고, 길이 안든 상황에서 혹사시킨 데다, 하필 부딪힌 게 사자왕이었으니... 

덕분에 본편 마지막과 만화판의 전개를 일치시켜 타임패러독스(...)를 피하긴 했습니다. 
카구라와 요미의 전투에선 이전에 츠치미야 대인이 사슬 말고 다른 무기를 안 쓴 이유가 확연하게 드러나죠. 이놈의 사슬 때문에 교수형을 당할 뻔 했으니 말입니다. 카구라가 마지막 대결에서 백예를 안 꺼낸 게 다 이유가 있어요.


초반에 카구라가 노리유키를 찾아갔던 이유는 그의 능력이 급했기 때문입니다. 노리유키 자신의 전투력도 상당하지만, 관측반이 전멸한 이상 그의 정찰능력이 필요했으니까요.
노리유키는 아마도 미리 현장부근에 가서 사방에 여우를 풀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지켜본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절묘한 타이밍에 카구라의 숨통을 틔어 준 거죠. 그의 공격은 단순히 재정비시간을 벌기 위한 거라기 보단 요미를 죽이려들 수 있는지 오기 부리듯 시험해본 게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스스로의 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요미가 카구라에겐 온전히 밝히지 못하고 자신에게만 필사적으로 부탁했던 말을... 연인의 목소리를 대신하고 그녀의 누이에게 칼자루를 완전히 넘기죠. 

나부와 이와하타는 싸움이 마무리되기 이전부터 지켜보고 있었겠죠. 그럼에도 방관한 이유는 실질적으로 끼어들기도 힘들고, 카구라 자신의 숙업인 탓도 있었어요. 
그리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뒷일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번 사태로 요미나 노리유키를 비롯한 에이스들과 직원들이 너무 많이 줄어든 이상 카구라를 핵심전력으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더 이상 거칠 게 없는 존재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그들 나름의 배려이기도 했습니다. 대책실 직원들은 정도의 차는 있지만, 뼈아픈 상실을 겪고 세상에 발 딛지 못하게 되어 문을 두드린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카구라와 비슷한 경험을 치렀던 그들 입장에선 막둥이처럼 귀여워하던 소녀가 차라리 덜 아픈 길을 고르길 바랬던 거죠. 많은 걸 깎아내야 하는 길이지만요. 한편으로 그들은 카구라가 인간의 길을 벗어나지 않길 비는 이율배반적인 바램도 품습니다... 

이는 카구라만이 아니라 노리유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구라가 스스로를 깎아내며 부대낀 것에 반해, 노리유키는 갈팡질팡하며 이도저도 떠안으려다 처참하게 주저앉았죠. 마침내 청년은 연인의 유품을 보며 홀로 눈물을 삼킵니다. 아마도 핸드폰에 새겨진 칼자국이 어떤 뜻인지, 그녀가 진실로 찌르려고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을 겁니다. 모든 과정을 여우를 통해 지켜보기도 했고... 그녀의 핸드폰 액정에 어떤 사진이 있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진실한 이해


9화에서 요미가 카즈히로의 세례를 받는 장면이 불쾌했던 건 욕보이는 식의 연출도 그렇지만, 바로 몇 분전에 카구라가 몸을 씻어주던 게 연상됐기 때문입니다. 아픔을 덜어주기 위한 손길의 소유자는 누이의 모든 걸 공감하려 들면서도 끝내 가장 중요한 진실을 이해하지 못한 반면, 악의덩어리에 가까운 인간쓰레기는 그녀가 품고 있던 암부를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점이 보는 사람의 분노를 돋우더군요. 
돌이켜보면 요미는 자기 안의 어두운 사념을 필사적으로 부정했었죠. 그녀의 동생 또한 그랬고요. 그 결과는 보시다시피 처참합니다. 

카구라는 그렇게 요미와 비슷한 상황에 당도하고 나서야 누이의 흉금을 진심으로 이해해주고자 노력하면서 닮아갑니다. 본편초반에 카구라가 죽음의 의미에 대해 논할 때 그래서 섬뜩했습니다. 광기로 치닫고 있는 요미가 할 법한 소리였으니까요. 
아버지의 충고대로 모든 걸 짊어지겠다 다짐했던 카구라는 늦게나마 사과를 합니다. 예전의 노리유키처럼요. 그러나 요미의 말대로 너무 늦은 사과였죠. 카구라가 늦은 게 아닙니다. 요미가 카구라의 사과를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먼 길을 걸어온 거죠. 

요미가 카구라에게 영수운운하며 뇌까린 말들은 4화에서 카구라가 영수가 있으면 현장에서 보탬이 될 거라고 지나가듯이 말한 걸 비꼰 겁니다. 이에 카구라도 마침내 폭발하고 말죠. 그녀가 한 말이 진실을 짚어서가 아니라, 돌아가신 춘부장을 비롯해 모든 걸 씹어대는 눈앞의 여자가 자신이 알던 가족이 아니라 쳐죽여 마땅한 금수로만 보였던 겁니다. 

널뛰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카구라는 아직도 각오를 못 다졌죠. 목을 날릴 기회를 잡고도 망설이는 우를 범하질 않나, 처음으로 요미에게 증오를 품고 일격을 성공시키자 스스로가 더 경악하질 않나... 

결국 카구라는 노리유키를 통해 요미의 마음을 전해 듣고 나서야 결심을 다집니다. 2화나 10화에서처럼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생각을 굳히거나, 깜냥도 안 되면서 요미를 이해하려드는 게 아니라, 요미를 향한 자신의 응어리들부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한 거죠.
그리하여 카구라는 이제까지와는 반대로 언니를 기다리다 맞이한 후, 처음으로 그녀를 ‘당신’이라 칭합니다. 세상 망하는 일이 있어도 밀어버려야 할 객체로써 처음으로, 그리고 온전히 인식한 겁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임박해서 그녀가 떠올린 기억은 행복한 추억뿐이었죠.
바램


최종화를 앞두고 11화를 다시 보다가 의아했던 게 있습니다. 실장 팀과 일전을 치른 요미가 왼쪽 허벅지에 붕대를 감고 있더군요. 살생석의 재생력 덕에 개틀링이건 폭탄이건 배겨냈으면서, 왜 저 상처만 치유가 덜 된 걸까, 그냥 와이어에 좀 찢어진 상처에 불과한데 등등... 별의별 의문이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황당하게도 저 붕대는 단행본에서도 감고 있던 물건입니다. 만화책 1권과 2권의 회상에서도 살생석을 쓰던 요미가 붕대는 왜 감나, 하고 궁금했는데... 이게 의외로 중요한 포인트였습니다.



1차적인 이유만 따지면 그녀가 실장과 키리의 결계를 왼발로 두 번이나 밟았기에 왼쪽 다리만 재생력이 떨어졌던 거죠. 실제로 전투 중에 다리를 움켜잡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말이죠, 키리의 이야기를 참고하자면 그녀는 괴로워하면서 자리를 떴다고 합니다. 추측입니다만, 이때 그녀는 아마도 키리와 실장의 행동에서 자신과 카구라를 떠올리고 순간적으로 인성을 되찾아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떠난 게 아닐까요. 이게 그녀의 재생력에도 영향을 끼친 게 아닐런지. 

이 시점부터 최대한 살생력의 힘을 자제하고 어떻게든 스스로의 인격을 유지하려고 했고, 이 때문에 이미 나았을 상처의 붕대도 그냥 놔뒀던 걸지도 모르죠. 스스로에게 인간이란 점을 암시하기 위해서요. 뭐, 엄습하는 사념들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것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재수 없는 돌은 요미가 자신의 사념에 충실할 순간이 아닌, 오히려 저항하려 할 때 기어 나와 흉흉한 빛을 발했죠. 다시 고개를 드는 인성을 찍어 누르기 위해서 말입니다. 11화에서도 그녀는 카구라의 아버지를 죽인 직후에 이성이 순간적으로 돌아왔었죠. 10화에서 카즈키를 죽일 때부터 끼를 보이던 내면의 분란이 대인의 죽음과 실장커플의 행동을 통해 불거지기 시작해 이런 결과를 낳고 만 겁니다. 

기가 막힌 건 그녀가 이런 아픔을 겪을 때마다, 살생석들이 공명해 카구라를 그녀에게 인도해주곤 했다는 겁니다. 차라리 잊고 싶고, 제껴 버리고 싶은 고통이 자매를 이어주는 매개물이 된 거죠.


마지막 결전에서 흘러나왔던 음악은 11화 말미에서 대인이 임종할 때, 나오던 ‘Reincarnation-Last Harmony’였습니다. 자매가 예고멘트를 날릴 때처럼 두 보컬이 좌우스피커에서 따로 노래를 흘려보내며 시작하는 노래였죠. 노래 제목 그대로 마지막으로 합을 이뤘던 자매는 그 어느 때보다 닮아보였습니다. 

중간에 카구라의 회상인 듯한 장면들이 교차됩니다만, 과연 그것이 카구라만의 심상이었을까요... 그 직후 카구라가 스스로의 마음을 고백하자마자 누이의 이마에서 붉은 돌이 빛을 발하고 있었죠.
결말의 내역에 대해 만화책에서도 암시는 나옵니다. 요미에게 인간성이 아직 남아있었을지도 몰랐다고요. 허나 그녀의 마음이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특히나 결전직전에 핸드폰을 찍어 내리는 행동조차 더 이상 주저할 것도 없이 갈 데까지 가겠다는 식의 행동으로만 보였기에 저에게 이것은 반전 아닌 반전으로 다가왔습니다. 

최종화 전반부에서 고통스러워하던 요미가 핸드폰의 액정을 보며 빌었던 소원과 마지막 싸움 전에 핸드폰을 내리찍은 연유가 후반에 가서 온전히 드러날 때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쥐었습니다.

요미가 그랬죠. 카구라를 구원해주고 싶었던 계기가 자신과 닮은 구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요. 자신과 달리 모든 걸 타고 태어난 존재에 대한 동경심과 대리만족 비슷한 감정의 발로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운명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야 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한 아이란 점은 분명했고,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겁니다. 
요미의 말대로 카구라야말로 자신이 선택하고 보듬어온, 하나뿐인 보물이었습니다. 카구라도 ‘요미언니’의 말을 지키기 위해 싸움에 임했던 거고요
닫으며.


요미의 허벅지 상처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이 듭니다. 그녀가 카즈키를 죽이기 전에 도막냈던 부위도 같았고, 좀 더 거슬러 가면 카구라도 비슷한 상처를 입은 걸 계기로 많은 아픔을 겪으며 변해갔죠. 이 또한 그네들의 인연과 운명의 증거물이 된 셈입니다. 
오프닝의 제목이 바로 ‘실낙원’인데, 가사 중에 ‘여기는 배신의 티르 나 노그(Tir-nan-Oge)인가’라는 대목이 있었죠. 티르 나 노그는 우리나라의 신선놀음이나 일본의 우라시마전설처럼 시간마저 잊게 만드는 켈트신화의 낙원입니다. 

아픔과 상실 속에서 찾아내고 가꿔왔던 낙원이 사라져가던 순간, 요미는 자신을 짓누르던 세계를 파괴해갔고, 카구라는 모든 걸 짊어지려고 했죠. 


이제 와서 생각하면 태양이 잘 안 나오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요. 달은 종종 모습을 비추는데 말입니다. 저번 화를 즈음해서 오프닝의 말미처럼 카구라가 햇빛을 향해 돌아서는 식의 연출이 늘었더군요. 세상과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제대로 마주하겠다는 결심을 받혀주듯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보듬은 채 정인을 찌르려 했던 자와 모든 정념 중 하나만을 껴안고 나아가던 자가 마지막 순간에 떠올린 추억은 한결같았습니다. 
결국 본작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테제가 이거였던 겁니다. 인간이 안고 갈 수 있는 것은 두 팔 벌린 만큼일 뿐이고, 모든 걸 저버리려 해도 떨쳐낼 수 없는 게 분명히 있다는 거죠. 
자매가 마지막으로 서로를 안았던 순간은 하나로 겹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 생각하면 요미의 마지막 표정을 보여주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가요. 누이의 표정과 온전히 같았을 테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요미는 카구라의 안에 완전히 뿌리내리고 맙니다. 트라우마 때문에 그토록 두려워했던 원령들이 몰려오지만, 이전과 달리 그녀는 공포가 아니라 한을 담아 절규하죠. 
그걸 보면서 확신이 들었습니다. 요미와의 추억이나 마음만이 아니라, 망할 놈의 세상을 향한 애한마저 물려받았다는 걸요. 



말미에 사라진 카구라를 그리워하던 친구들이 마음 아픈 나머지, 그냥 잊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추억을 되새기죠. 다 같이 먹던 빼빼로를 꺼내든 처자들의 배경에 있던 타워 근처에서 역시나 빼빼로를 꺼내들며 새롭게 사귄 파트너와 만담을 나누는 카구라를 보자니, 참 알싸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시간대는 달라도 바로 코앞인데 말입니다. 그래도 이전과 달리 웃으면서 돌아설 수 있게 된 처자의 모습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왜 그리 답답했는지 모르겠습니다...
ETC...


아야메&키리. 살아있었다는 게 의외였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키리를 살리기 위해 급하게 사적인 라인을 쓰느라 자리를 비운 결과, 다른 직원들은 뼈도 못 남기고 황천 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네요. 키리는 과다출혈쇼크로 인해 뇌신경손상이나, 정신퇴행을 겪었겠죠. 생각해보니 오프닝에서도 깃털을 들고 있진 않았고, 새들이 배경을 날고 있었는데, 죽는 게 아니라 그저 대책실을 떠난 셈이니... 경위야 어찌됐든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지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리 된 키리를 위해 아야메도 사표를 썼겠죠. 어찌 보면 가장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커플이 아닐까요? 
노리유키. 참 안됐죠. 짜증나는 세상 너털 웃으며 살겠다 마음먹었는지, 단행본에서도 건들거리는 태도로 일관하더군요. 이때의 상처 때문인지 본인의 행복보다는 타인의 행복을 뒤에서 받혀주며 살기로 결심했더랬죠. 자기나 약혼녀처럼 되지 않길 바라면서요. 그러면서도 마음속에 칼을 제대로 숨긴, 그런 인간이 됐습니다. 단행본 첫 등장 때부터 가끔 손목에 차고 있던 저 부적에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씁쓸할 따름입니다.
나부. 어눌한 데도 불구하고, 와카모토 선생이 맡은 캐릭터 아니랄까 마지막 대사가 멋들어지죠.

후지코(不死子)실장. 이름은 루팡 3세의 그 여자에게서 모티브를 딴 것 같더군요. 모티브에 걸맞게 젊은 시절엔 작중 최강급 미인이었죠. 수많은 전란을 헤쳐 현재의 시스템을 확립시킨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나요. 이름에 걸맞게 어떤 난관에 빠져도 반드시 살아 돌아오는 작내 최강의 불사신 할머니입니다.
미토가와. 이 친구도 나중에 본작의 부제랄까, 주제에 걸맞는 결말을 맞더군요. 그에게 있어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방식으로요.
켄스케. 목소리 듣고 뜨악해서 스텝롤 보니... 카즈키!! 후속작 나오면 미노루 대인도 분명 돌아오시겠죠. 
특전4과. 너희들은 그저 요미의 포니테일(...)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고깃덩이였더냐, 정녕 그렇단 말이냐?! 성우 아깝고, 설정 아까워서라도 원령으로나마 돌아왔으면 싶네요.
☑표시. 제목이든 스텝롤이든 빠지지 않고, 붙어있는 이 표시 말인데요, 혹시 주제에 맞춰서 이 작품을 만든 사람들과 구성요소를 모두 잊지 말고 새겨두라는 뜻으로 기입한 건 아닐지?

2화와 10화의 무대가 된 시설도 모델이 있더군요. 4화의 출입금지된 신바시역이나 지하도 근처의 밀림도 실제로 있는 장소라는데... 묘하게 현장감 높은 작품이란 말이죠. 

마지막에 이와하타팀이 저 칼을 발견하는 걸 보고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카구라와 켄스케의 대화장면이 바로 단행본 1권의 도입부였는데, 참 많이도 돌아왔다는 생각마저 들더라고요.
요미와의 마지막 전투장소나 결말에 이르기까지, 황당할 정도로 원작에 대한 해석률이 높으면서도 충실한, 참 묘한 작품이 됐지 뭡니까? 사실 원작만화는 좀 펑크가 여기저기 보이는 편인데요(대표적인 예로 요미의 붕대위치가 바뀌는 옥의티를 들 수 있죠.), 이런 점마저도 뜯어고치다시피 한 정성을 보면 놀랍죠.
본작의 핵심캐릭터 중 하나인 메이는 딱 보고 모티브가 훗날 정식(?) 처녀귀신이 된 요미란 걸 알 수 있었죠. 요미가 카구라와 간만에 재회했을 때 머리에 꽃을 꽂고 하카마 차림에 양산을 쓴 메이지 규수같은 행색을 했었죠. 아니나 다를까, 참 많은 걸 요미에게 물려줘 따라하게 하더니, 나아가 카구라마저 변모시킵니다. 
그리고 원작의 회상에 나온 요미를 보면 그냥 모범생일 따름이었는데, 여러모로 카구라의 현재 성격을 완성시킨 멘토로 탈바꿈했습니다. 모범생은 맞되, 장난스런 애정표현을 즐기거나, 게임을 좋아하고, 타고 다니는 스쿠터모델, 빼빼로까지 카구라가 거의 다 물려받다시피 했죠. 머리를 기른 것도 요미를 추억하기 위해서였던가 그랬을 걸요. 애니제작진이 프리퀼을 만들면서 요미를 보다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현재의 카구라를 많이 참조한 것 같아요. 특히 켄스케 대하는 걸 보면 참... 

켄스케에게 12호를 맡긴 이유는 더 이상 누구도 날붙이로 찌를 수 없을 정도로 트라우마가 굳어진 탓이 크려나요.
갈수록 오리지널 작품이 줄고, 만화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느는 시국을 안타까워하는 분들도 많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이런 애니화는 언제든 환영하고 싶네요. 그런 의미에서 제발 후속편 좀 나왔으면 합니다. 이왕이면 또 다른 요미라 할 그 마피아 아가씨가 주인공인 걸로 말이죠.
3개월 동안 즐겁게 해준 애니제작진과 자막제작자분들, 지리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면서 이만 줄입니다. 즐거운 성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P.S. 미스테리가 남습니다. 대책실이 찐따가 아닌 바에야 요미의 시신을 확실히 처리하거나, 사자왕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겼을 텐데... 2년 사이 무슨 일이 있어 미스 다스베이더가 무덤에서 일어나신 건지, 칼은 어떻게 되찾은 건지 원.
개인적으로 요미는 참 복잡하게 다가온 인물이었습니다. 피해갈 수 없는 좌절 앞에서 무너진다는 게 뭔지 깨달았던 일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9화가 그때 방영했거든요...
어쨌든 본작은 첫째도 요미, 둘째도 요미를 위한 작품이었죠. 여동생한테 껌뻑 죽는 데다, 바이(...) 기질이 다분하고, 모조리 파괴하고 칼침 맞길 유도하는 거 하며 눈 색깔마저 보라색이라니... 어느 동네 폭군마마랑 통하는 구석이 많은 것 같습니다. 
# by | 2008/12/25 09:50 | 천기누설 겸 감상 | 트랙백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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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에 hineo님의 글을 통해서 '분명히 zemonan님이라면 식령 분석글에 건그레이브를 언급할거다'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제가 틀렸네요. ^^;;
솔직히 이것저것 인용하는것을 생각했다면 분명히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번 분석은 해당 애니에만 집중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을 리뷰 적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즐거운 성탄절 보내시기를 ^^
사실 이번 식령의 경우는 이런저런 소품이나 잡다한 면에서 작품에 영향을 준 요소들은 정리했지만, 내러티브에 있어선 작품 그 자체에 집중하고 싶었던지라, 다른 작품들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원작만화라는 비교대상이 있으니 굳이 그러고 싶질 않더라고요. 아무튼 즐거운 성탄 되셨길 바랍니다.
세이레이님//말씀 감사합니다. 즐겁게 성탄을 보내셨길 바랍니다.
박고자님//덧글에 감사드립니다. 벌써 성탄절도 다 끝나가는군요.
그리고 보다보니 노리유키가 켄스케를 도와주는 이유가 절실히 느껴지더군요.
전 노리유키덕에 켄스케가 7권의 일을 할수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노리유키가 켄스케 였다면 요미를 구할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지나가던 인물A님//짝패들이니까요. 카구라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너무도 많은 걸 물려받았죠. 심지어 세상에 대한 회의와 혐오감마저도요... '제로'의 이야기를 통해 노리유키가 어째서 그토록 두사람을 도와줬는지, 또 미토가와에게 살심을 노골적으로 품었는지 납득이 갔습니다. 7권에서 노리유키가 켄스케에게 일침을 놓은 게 오히려 그 자신과 다른 결과를 자아냈죠. 물러서고 만 노리유키도, 전진해야만 했던 카구라나 켄스케도... 결국 행동의 기저가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요미를 다스베이더에 비유하신 부분에서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소중한 것을 위해 전력투구하다 역으로 그 때문에 파멸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참 안타까운 면이 있지요. 하지만 어떻게 봐도 막나가는 반항청소년에 가깝던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제국의 폭풍간지 베이더경으로 변한 것에 비해 요미는... 으음. (...)
언제나봐도 멋진글입니다. 식령제로 이후로 그다지 좋은작품이 없어서그런가 2009년에는 리뷰글이 없군요;
어쨌든 진리의요미